[목숨] 굴욕의 일제강점기 마산 사람들의 삶
매체명 : 경남도민일보   게재일 : 2023.04.26   조회수 : 65

근현대 마산 배경 역사 장편소설

마산 출신 하기주 소설가

코오롱 대표이사 은퇴 후 집필

 

하동 출신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 지난달 출판된 하기주(84) 소설가의 역사 장편소설<목숨>을 읽으며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소설의 이런 의미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이제 80대 중반에 접어든 작가의 첫 작품이다. 작가는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마산 토박이로 지역민에게는 ()코오롱 대표이사를 지낸 이로 더 잘 알려졌다. 소설이 나온 배경은 1권 뒤에 실린 고승철 소설가의 해설에 잘 정리돼 있다. 하기주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문학상을 받을 만큼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학과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은퇴를 하고서야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

<경남도민일보>와 전자우편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소설<목숨>은 은퇴 직후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했다.

 

"2000년에 회사(코오롱)를 나와서 약 2년에 걸쳐 완성했으니 20여 년 전에 완성한 것입니다. 작품을 완성한 후 김치수 평론가에게 보였더니 '다 좋은데 출판은 등단 뒤로 미뤄서 독자들 지명도를 얻은 후에 정식 출간하는 게 좋지 않겠냐'란 권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간을 미뤄왔는데 이번에 20여 년이 흐른 후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소설은 1941~1944년 일제강점기 마산을 배경으로 한다.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더욱 악랄하게 사람과 물자를 수탈하던 시기 마산에서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온 강씨 일가에 일어난 일들을 다양한 인물을 통해 풀어냈다. 마산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개항하면서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각축장이 된다. 제국의 수탈이 이어지며 자연스레 민족의식이 자라나기 좋은 환경이었다. 소설이 풀어낸 마산 이야기를 먼저 보자.

 

"창원은, 지금은 마산부의 변두리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오히려 마산이 창원의 외촌 합포라 하여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가 마산을 개항지로 지정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상업이 일고 공장이 들어서자 신흥도시로 발흥하게 되었다. 개명천지가 되자 근대화 산업을 물결이 몰려왔다." (162)

 

"소백산맥이 갈비뼈처럼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오다가 오르락내리락 건너뛰기를 반복하더니 마지막으로 불끈 솟은 무학산 줄기가 가파르게 바다로 곤두박질하고, 개항지로서 항구는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중략) 마산항은 마치 진해만 바다로부터 구덕을 파서 들여놓은 김칫독같이 묻혀 있는 내항이다. 바다 어귀에 돝섬이 파도를 가로막고 떠 있다. 결코 너올이 질 수 없는 잔잔한 바다. 아득한 천연의 양항이다. 항구는 폐병 환자들의 새너토리엄(요양소)이 자리 잡고 있는 요양도시이기도 하였다." (2331)

 

"이 고장은 예로부터 물 맑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수질을 분석하고 나더니 일찌감치 정종 공장부터 세웠다. 그리고 1905년에는 800여 년 전 고려 때 수맥 찾기에 이골이 난 몽골 군대가 내려와서 파놓은 우물 옆에다 일본의 깃코망에 못잖은 조선 제일의 간장 공장도 세웠다." (389)

 

"여보게, 우보! 어서 나가세! 창동 거리에 만세시위가 터졌다네. 야소교 사람들이 벌써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네. 부림 장터에서도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외고패고 난리가 났다는 걸세." (176)

 

2권 소싸움 장면에서는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시대 배경도 잘 묘사돼 있다.

"백정은 조선 칠천역의 제일 밑바닥 인생이었다. 기생을 비롯하여 무당, 광대에 이어 포졸, 갖바치, 고리장 그리고 그 다음 맨 마지막이 칼잡이 백정이었다. 그들의 몸을 담고 있는 사회의 밑바닥은 뻘 구덩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온몸에 뻘 칠갑을 하고 하우적대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목숨이었다. 평생을 살되 차별과 극빈의 구렁텅이로부터 헤어날 길이 없었다. (중략)심지어 명절 제수 거리로 쓸 육고기를 사러 심부름을 보내는 집안 아이들에게까지도 그들과 맞상대로 말을 주고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허드레 종이에 주문 내용을 써서 보냈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말 한 마디 할 것도 없이 돈과 종이를 내밀면 백정은 묵묵히 육고기 싼 봉지를 건네주었다." (277~78)

 

특히 소설에 담긴 세밀한 지역 풍속과 충실한 방언(사투리) 묘사는 이 소설에 문화사적 가치를 더한다. 예를 들어 1권에 나오는 전통 혼례, 2권 소싸움 장면, 3권 제사 모시는 과정을 그린 장면에서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 처럼 세밀한 묘사와 방언 사용이 두드러진다.

 

3권에서 동래댁이 새며느리에게 제사 음식을 가르치는 장면을 보자.

 

"아헌례의 절차가 되었다. 집사는 육적을 거두고 어적을 내왔다. 주인은 물러서고 차종부로 참사한 새댁이 헌관을 맡았다. 새댁은 화사한 화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향로 앞으로 나아가 가만히 두 손을 모아 공수를 짓는다.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겠다. 읍의 예를 드린다." (338)

 

"조구 다듬은 손은 비린내가 타니까 식초로 손을 씩도록 해라이. 헛간에 마시다 남긴 막걸리 됫병이 있다. 벌써 시어서 식초가 됐을 낀께 갖다가 손을 매에매에 헹구거라이. 그라고 야야아, 제숫거리는 고칫가리하고 파하고 마늘 다진 거는 양념으로 쓰는 기이 아이다. 구신계서 역하다고 고개를 돌리신다. 절간 음식맨키로 고마 간장하고 소곰으로 간만 내모 된다이. 공 들여서 정갈케만 다듬으모 조상님께서도 기꺼이 음향하신다아." (317)

 

"먼저 쌀을 잘 씩거 갖고 소쿠리에 담가서 물에 불맀다가, 한참 만에 건지내서 물기를 빼고 솥에 안치야 한다이. 장작을 쌓아 센불로 지펴서 후꾼 데펴라이. 바글바글 버끔이 잦아들모, 뚜껑을 열어 김을 뺐다가 다부 닫아서 자작자작해진 쌀을 뜸 들이거로 해라이, 불을 중하로 낮차서 말이다." (327)

 

이렇게 상세한 기록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작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경험을 되살려 집필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하루는 외사촌 동갑내기가 옆집에 사주단자가 왔다고 하길래 그것이 궁금해 기어코 뜻을 알아내었습니다. 크면서 집안혼사를 보고듣고 하면서 어휘를 익혔습니다. 집필하는 동안은 자료조사차 도서관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

 

, 담담한 서술만으로 분위기를 살리는 풍경 묘사는 오랜 기간 벼려온 작가의 글솜씨를 잘 드러낸다.

 

"썰때였다. 조금 물이 훌쩍 빠져나갔다. 마을 앞 개펄에는 돌을 질러 두렁을 삼아 지어 놓은 경계가 드러났다. 물기가 자작자작 남은 고운 뻘밭에 게들이 집게발을 치켜들고 기어다니며 실처럼 가느다란 눈금을 긋는다. 물 밑에는 새파란 파래가 일렁인다. 바위에 들러붙은 말미잘이 촉수를 움츠리며 먹잇감을 말아 넣는다. 가리비가 물살을 타고 지나간다." (1154)

 

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숨가쁜 나날들을 보냈을 지 상상이 된다. 그런 와중에 글을 쓸 시간은 없을을 테다. 작가는 그 기간 어떻게 글을 단련했을까.

 

"직장에 충실하느라 글 쓸 시간은 없었고 소설은 꾸준히 읽었습니다. 고교시절 현대문학, 헤르만 헷세, 안톤 체홉을 읽고 되읽고 했습니다. 특히 체홉은 번역문이지만 문장 구성, 간결한 묘사, 플로팅, 읽고나서 잦아드는 페이소스 등에 매료돼 그의 단편을 읽으면서 잠드는 습관까지 있었습니다. 그게 문장수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기주 소설가는 내달 마산을 방문해 지인들과 소설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목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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