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일어나다

김형국 지음

판매가(적립금) 28,000 (1,400원)
판형 신국판
면수 368
발행일 2024-03-15
ISBN 978-89-300-4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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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도서 금액     28,000

최장수 현대화가 김병기의 백년 예술인생을 조명하다

한국현대미술을 이끈 1세대 추상미술화가 김병기의 삶과 예술

 

  《바람이 일어나다: 한국현대미술의 프로메테우스 김병기의 삶과 예술》는 2022년 106세를 일기로 타계한 ‘최장수 현대화가’ 태경 김병기(台徑 金秉騏, 1916~2022년)의 예술인생을 조명한 최초의 평전이다. 격동의 현대사를 헤치며 한국 미술의 현대화를 이끌고 마침내 ‘현대미술의 달인’의 경지에 이른 1세대 추상미술화가 김병기의 치열한 삶을 연대기순으로 복원했다. 김병기 화백의 평창동 이웃으로 20년간 교류하며 ‘인간 김병기’를 누구보다 깊게 탐구한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가 8년에 걸쳐 집필한 역작이다. 장욱진, 박경리, 김종학 등 예술가들의 깊이 있는 평전으로 유명한 김형국 교수는 김병기의 구술뿐만 아니라 국내외 문헌, 가족과 지인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김병기의 역동적인 백년에 걸친 삶과 한국현대미술사 백년의 흐름을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 그동안 장수를 누린 화가나 이중섭, 김환기의 동창으로만 알려졌던 김병기의 진면목과 아울러 그가 한국현대미술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을 재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책 소개글

 

 

김형국 교수가 쓴 최장수 현대화가 김병기의 유일한 평전

  2022년 3월 15일, ‘106세 최장수 현대화가’ 김병기의 수목장이 경기도 포천의 나남수목원에서 열렸다. 이때 김병기 화백의 가족과 함께 고인의 마지막 길을 조용히 지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바람이 일어나다》의 저자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였다. 

 김형국 교수는 지인의 소개로 김병기 화백을 만난 후 그의 인간적 풍모에 이끌려 20여 년간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며 그의 만년을 함께했다. 김 화백의 화실에 초대받아 열정적인 작업 과정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냉면을 함께 먹으며 기나긴 인생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나눈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생전에 김형국 교수가 쓴 장욱진 평전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써 달라고 청했고, 김 교수는 그의 구술을 여러 차례 받아 적기도 했다.

  그러한 오랜 만남의 세월이 쌓이면서 탄생한 이 책은 김병기 화백의 전 생애를 담은 유일한 평전이다. 김병기의 백년 인생과 한국현대미술사에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평론가들의 작품론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 김병기’를 재발견한 한국 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역작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김병기의 진면목과 최장수 화가로서 이루어 낸 업적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현대미술사의 잊힌 거인 김병기를 재발견하다

  김병기는 1세대 추상미술화가이자 미술이론가로서 탁월한 열정과 지성을 갖춘 문무겸장의 인물이었다. 106세의 긴 인생을 살며 동시대 화가들이 이루지 못한 남다른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계의 헤게모니 다툼과 그의 오랜 미국 생활로 김병기는 한국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형국 교수는 김병기 화백을 세상에 알리고자 오랜 시간 동안 애정과 열정을 쏟아 왔다. 신문이나 저널에 그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전시회 준비 등을 도우며 그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기도 했다.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장욱진, 김종학 등 수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깊이 있는 평전을 써낸 김형국 교수는 김병기의 독보적인 작품세계와 고매한 인품을 알아보았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그의 자리를 되찾아 주고자 애썼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김형국 교수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8년간 김병기의 구술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 문헌, 가족과 지인의 증언을 총동원함으로써 김병기의 백년의 삶과 한국현대미술사의 전개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

 

한국 미술 현대화를 이끈 1세대 추상미술화가의 기록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병기는 창작은 물론이고 이론과 비평, 교육 등에서 한국 미술 현대화에 기여한 1세대 추상미술화가이다. 일제강점기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와 문화학원에서 공부하며 추상미술 창작과 비평활동을 시작한 그는 문예지 표지화와 연극 무대미술을 담당하며 황순원, 유치진, 주영섭 등 시인, 소설가, 연극인 등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과 소통하며 종합적 관점에서 현대미술의 외연을 넓히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 미술동맹 서기장, 6.25 땐 남한 종군화가단 부단장, 1960년대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격동의 시대에 예술가들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했다. 또한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며 현대미술이론과 교육을 체계화하고, 서울예고 설립을 주도하며 미술 조기교육을 선도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을 맡으며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디자인’이란 용어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도 그였다. 

  이 책은 1세대 추상미술화가 김병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현대화가들의 성장과 현대미술의 발전, 미술계의 변화 등 한국현대미술사 백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펼쳐 보였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바람처럼 일어난 백년 예술인생

  이 책의 제목 ‘바람이 일어나다’는 김병기가 청년 시절부터 좋아한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에서 따왔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6.25 전쟁 등 생사를 넘나드는 파고 속에서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김병기가 자신을 가다듬는 좌우명으로 읊조리던 이 구절은 그의 실존적 고뇌, 생의 의지와 맞닿아 있다.

  김병기는 그 누구보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고, “그림은 시대정신을 담아야 하며 레알리테(진실성)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고하게 화실에서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민중과 사회를 위해 직접 발로 뛰며 노력했고, 다른 예술가들도 이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6.25 전쟁 때는 선우휘, 이용상과 함께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이어 피란민 수만 명의 생명을 구했고, 전쟁의 실상을 왜곡한 피카소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김병기는 평양, 도쿄, 서울, 뉴욕을 오가며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을 아우르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보스턴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보스턴 글로브〉에서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대서특필했다. 104세의 개인전에서는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만년까지 맑은 정신으로 치열한 창작활동에 매진하여 마침내 ‘현대미술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었다.

 

▎책 속에서

 

  태경은 나와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한마디 던졌다. “당신이 장욱진을 유명하게 만들었네. 모르는 사람들은 장욱진이 술만 많이 마신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네. 그 책이 비로소 장욱진의 정체를 알렸고, 유명하게 만들었네. 나도 제발 유명하게 만들어 주게!”(22쪽)

 

 

  그의 화실은 내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졌을까. 아주 가까운 이웃이었다. … “한번 화실로 놀러 오라!”는 말을 들었다. 화가의 화실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찾고 싶은 곳이다. ‘비처(秘處)’로의 초대는 주인공이 애호가들에게 베푸는 가장 큰 호의이고, 초대받는 사람에게 일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23쪽)

 

 

  화실 작업 광경에 대해 한 꼭지 글을 완성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관지에서 문화예술에 관한 글이면 아무거나 괜찮다 해서, 그러면 화가의 작업실에 대해 적겠다고 했다. 김병기를 소개하는 글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90 전후인데도 맑은 정신으로 의욕적으로 작업하는 광경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라 그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25쪽)

 

 

  태경의 지적은 오랜 역사의 서양미술 전개를 제대로 읽는 데는, 아니 보고 느끼는 데는 루브르만 한 곳이 없다는 말이었다. 다독으로 미술이론에 무척 정통했던 태경은, 무릇 서양화가라면 서양미술의 오랜 축적과 전개에 대한 견식은 절대 필수라는 입장이었다. (27쪽)

 

 

  이래저래 직접 대면할 기회가 많아졌다. 당신의 국내외 그림 전시를 앞두고 전시 관계자나 사진작가를 만날 경우 배석을 청했던 것은 좀 공식적인 어울림이었다. 겨울철에 이어 더운 여름날이면 더욱 잦아지는 냉면집 순례는 방외의 어울림이었다. … 태경과 생전에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자리도 2022년 1월 23일 북한산 북쪽 자락 일영의 한 냉면집이었다. (34쪽)

 

 

  자주 어울릴 기회가 생기면서 김병기의 인간적 풍모 정도는 적을 만하지 않겠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 만년의 미술 성취 현장도 목격하고 체관(體觀)한 처지라면 피부로 부딪혔던 태경의 면모를 그릴 만도 하겠다 싶었다. 내가 뒤늦게 붓을 들기 시작한 까닭이다. (35쪽)

 

 

  김병기가 마음이 끌려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들어갔더니 대학원생급 화학도(畵學徒)들이 연구소에 모여 있었다. 10대는 그를 포함하여 둘뿐이었다. 니혼대학 전문부 미술반 3학년이던 김환기도, 3.1 독립운동 33인 가운데 한 분인 길선주목사의 둘째 아들로 술을 끊으려고 연구소에 왔다던 길진섭도 있었다.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홍보물에는 후지타 쓰구하루가 20년 만에 돌아와 가르친다는 알림이 있었다. (42쪽)

 

 

  김병기에게 이중섭은 두 학년 아래 후배였고, 1935년 문화학원에 들어가 처음 만났던 유영국은 동급생으로 같은 반에서 지냈다. 이중섭은 동갑 문학수를 오산고보 선배라며 형으로 대접했다. 태경의 입장에서는 “이 둘(문학수, 이중섭)은 문화학원에서 놀던 사람, 유영국이하고는 놀지 않았”다. 이중섭은 그때 한반도의 토종 소 품종으로 알려진 ‘평양소’를 열심히 그렸다. (49쪽)

 

 

  김병기는 월남에 성공했다. 이제 광복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대한민국에서 미술적으로 구현해 보고 싶었다. … 김병기와 김환기와 이쾌대가 특히 앞장서서 뜻을 모아 펼치려던 새로운 재야 미술운동은 그 성격이 “민족 미술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미술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우리 미술을 재건,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99쪽)

 

 

  서울대 강의를 시작한 것이 1953년. 화가로서는 아주 드물게 현대미술이론에 정통하다는 주변의 정평 덕분이었다. 이론에 정통함은 무엇보다 독서로 무장한 ‘문학청년’이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하는 말이기도 했다. 담당과목은 ‘현대미술형성론’. 서울대 초창기 강의는 부산 송도의 판잣집 임시 교사에서 했다. (135~136쪽)

 

 

  생이별한 지 6년 만인 1971년 드디어 아내가 왔다. 김병기는 아내가 옆에 있으니 갑자기 “서울이 옮겨온” 기분이었다. 새러토가에 드디어 “현실이 왔고, 또한 자리 잡았다.” 그사이 ‘생존해 냈던’ 새러토가 살이 6년은 “깊은 골짜기”에 들어 있었던 느낌이었다. 그즈음 작품이 바로 시인 엘리엇의 시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딴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였다. (194쪽)

 

 

  어쩌다 보니 보스턴 대도시권 케임브리지시에 있던 폴리아츠 화랑에서 14점을 가지고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를 본 미술평론가가 비평 기사를 세계적 유력 일간지인 현지 신문 〈보스턴 글로브〉에 크게 냈다. “작품은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작가의 화풍은 대단히 취사선택적인데 거기에 나타난 대표적 화제는 대체로 감춤이라 할까 겹쳐진 물감 사이로 떠오른 표상의 대상들”이란 식으로 관람 평을 적었다. (195쪽)

 

 

  김병기는 고국을 떠난 지 21년 만에 개인전을 갖는다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기 위해 잠깐잠깐 다녀갔다. 아내가 타계한 뒤 1998년 장기 체류를 작정하고 서울에 왔다. 가나화랑이 마련해 준 북한산 아래 평창동 화실이 근거지였다. 여기서 그리기 시작한 것이 〈북한산 세한도〉 시리즈다. 세한도(歲寒圖)라 이름한 것은, 그 화제로 앞서 그렸던 김정희(金正喜)처럼, 태경의 심경 역시 수구초심의 서울이긴 하나 어쩐지 유배 온 것 같다는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220쪽)

 

 

  다다이스트들은 태생적으로 비판적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현실 부정 일변도였던 다다이스트들과 다르게 스스로 ‘행동적 휴머니스트’라며 자신을 가다듬어온 김병기도 현실 비판 또는 현실 직시 발상법이 체질이었다. 처음 현실을 부정했던 발상을 다시 부정하면서 체감·체득한 긍정의 발상법이었다. 구체적으로 6.25 전쟁 때 피카소가 그린 〈한국의 살육〉이 한마디로 본말전도라고 격렬하게 비판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미학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237쪽)

 

 

  49세에 나는 비형상에 도달했다. 추상에도 형상성이 있는 추상이 있고, 형상성이 없는 추상이 있다. 유영국이나 김환기도 추상이지만 산이나 항아리라는 형상성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김환기처럼 점을 찍는 것은 형상성이 없어진 경우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비교적 가장 새로운 추상에 도달했다. (245쪽)

 

 

  화가의 화풍은 알게 모르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김병기의 화풍, 곧 추상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미학은 이른바 ‘틈새(in-between)미학’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틈새는 통시대적 국면이자 동시대적 국면이었다. (246쪽)

 

젊은 날, 많이도 바라보면서 그린 산이 아니었던가. 북한산은 한마디로 마음의 고향이었다. 북한산은 태경에게 바로 서울 그 자체이기도 했다. (274쪽)

 

 

  김병기는 백 세 시간대에 여느 화가들이 넘보지 못할 기록적 해프닝, 아니 활약상을 이어갔다. 만 백 살, 옹근 나이 백 세이던 2016년 봄에 개인전을 가졌다. … 제목은 문청(文靑) 시절부터 좋아한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에서 따왔다. … 부제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오롯이 개인적 성취의 자부심이 드러난다. “맑고 높은 절개가 오래도록 전해진다”는 뜻의 사자성어는 한민족 핏줄 모두가 꿈꾸는 경지다. (279~280쪽)

 

 

글머리에

1장 최장수 현대화가의 마지막 필력

영생처가 정해지다 / 높을 ‘台’(태) 길 ‘徑’(경) / 누가 평전을 적을 것인가 /

대척지향 서울 미대 두 교수 / 나도 한번 적어 볼 만하겠다

 

2장 김병기의 그림 입문

아버지가 후원한 일본 유학 / 양화연구소 출입, 그리고 후지타 회상 / 문화학원을 다니다 /

문화학원의 고향친구들 / 유학시절 작업들 / 무대미술 쪽도 관심 / 귀향의 시간 /

결혼 전야 / 글의 사람 / 〈삼사문학〉 동인 친구들 / 〈단층〉 동인들

 

3장 해방 전후 그리고 월남

한때의 마르크시즘 관심 / 김일성 치하에서 / 이태준에 대한 기억 /

북한 미술동맹 서기장이 되어 / 남행에 앞서 일단 몸조심 그리고 월남, 아니 탈북

 

4장 6.25 전쟁 발발 전후

6.25 전쟁 전야 / 피란을 못 갔다 / 스승 근원(近園)을 ‘보쌈’했던 빨갱이 /

고향 사람이 살려 주었다 / 다시 북한 땅에, 하지만 화급했던 피란길 /

부산 피란살이 / 종군화가단에서 활약 / 피카소의 6.25 전쟁 왜곡 참견

 

5장 환도 그리고 미술교육 일선

피카소 논란 끝 서울대 출강 / 정릉집 시대 / 미술의 대학교육과 중등교육 /

서울예고 미술부장, 미술도 조기교육 대상인가 / 바람직한 미술교육 방식은 /

장발 학장과 얽히고설켜 / 밀물 같던 오해도 세월 따라 썰물로

 

6장 미국으로 가는 길

비엔날레 커미셔너가 되어 / 록펠러재단 초대 손님 / 새러토가에 살다 /

형상이 있는 추상을 향해 / 새러토가의 사계 미국인 삶의 밑바닥 체험

 / 미국 정착 초기 그림들 / 금강산을 생각하며 / 일용생활인 김병기 

/ 미국 생활 맛을 익힐 즈음 /뉴욕 가면 만나던 김환기 / 드디어 아내가 왔다 

/ 새러토가의 부부생활

 

7장 다시 만난 고국산천

드디어 서울에서 개인전을 / 그림이 팔리다니 / ‘결코 늦지 않았던’ 파리의 만남 /

아내 타계 다시 파리로 / 다시 서울로 /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8장 김병기의 미학

다다이즘 근친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 현대미술의 물꼬를 튼 다다이즘 /

‘행동적 휴머니스트’의 비판적 현실주의 / 레알리테의 반면교육 

/ ‘추상’ 낱말 용례와 김병기주의 / 화풍 변화의 분기점 / 김병기의 화면 구성

 

9장 이제 세월이 흐르지 않네

내쳐 백 살로 살고 있다 / 백수 잔치의 시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 한일 미술전 참여 /

일본 방문에 이은 중국 전시 / 그림 제작은 흐르는 물처럼

 

10장 바야흐로 백세청풍

바람이 일어나다 / 장수 덕분에 옛 친구들 미덕도 말하고 

/ 옥길, 동길 남매의 ‘길(吉)냉면’ 백수 잔치 / 바야흐로 그림에 시가 있는 풍경이 

/ 귀빈의 전람회 내방

 

11장 한국궤도 재진입의 통과의례

다시 한국 국적을 회복하니 / 좋은 일이 꼬리를 물다 / 드디어 막이 오른 일본 전시 /

예술원 회원으로 뽑히다 / 백수 그림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12장 백 살에 맞는 성시 나날

백 살 현역의 망중한, 그럼에도 공사다망 / 말문을 열지 않을 수 없는 나날들 / 어쩌다 나들이 /

열려 있던 화실 / 104세의 개인전 / 당신 그림을 위한 변호 /

거처는 멀어져도 마음은 여전히 가까워 / 내가 마지막 본 김병기 화백

 

부록: 대동강철교를 어떻게 넘을 수 있었던가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김병기 연보

 

 

지은이 | 김형국

김형국은 1942년 경남 마산에서 났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이던 사이(1975~2007년), 동 대학원 원장,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한국미래학회 회장도 지냈다. 정년 뒤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제1기 민간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공간구조론》, 《고장의 문화판촉》 같은 전공 서적에 더해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 《김종학 그림 읽기》, 《활을 쏘다》,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박경리 이야기》 같은 방외(方外) 서적도 냈다. 인문학 연구가 학예일치(學藝一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바른 글쓰기 요령을 담아 《인문학을 찾아서》도 냈다. 인문적 행보로 원주의 토지문화관 건립위원장(1995년)과 서울스프링페스티벌 조직위원장(2006년)을 맡았고, 2014년 이래는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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