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독자, 이들을 이어주는 책, 책을 만드는 나남. 

‘나와 남, 나와 세계, 아(我)와 비아(非我)의 창조적 조화를 실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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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남이 걸어왔고 또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책을 만드는 일이 어렵다고 합니다. 뜻을 갖고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이를 지켜나가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인쇄매체가 갖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출판은 시대를 대변하는 지성의 외침이요, 문화수준을 드러내는 지표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이기도 합니다.  출판에 ‘격(格)’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책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대장정과도 같은 출판의 도정에서 ‘격(格)’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남이 이렇게 어렵기만 한, 길 없는 길을 걷겠노라 다짐하고 출발한 지 어느 덧 스물여섯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그 동안 2천 권이 넘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는 사람들의 땀 냄새에 취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고, 책다운 책을 만들겠다는 자기암시로 어려움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출판이 가슴 뿌듯하고 기쁨 넘치는 길이기도 함을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나남의 많은 저자들과 나남의 책으로 공부하고 나남의 책을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입니다. 

저자와 독자, 이들을 이어주는 책, 책을 만드는 나남. ‘나와 남, 나와 세계, 아(我)와 비아(非我)’의 창조적 조화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나남이 걸어왔고 또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주위에서 나남은 책을 많이 만드는 출판사라고 한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책이 나올 때마다 아이를 출산하듯 

늘 불안하고 설레고 속이 탑니다. 첫 울음만 요란한 아이이기보다 늘 건강하게 크는 아이이길 원하는 어버이의 마음 마냥, 

한권한권마다 오래오래 좋은 책이 되도록 절실한 염원을 담아냅니다. 

그래서 나남의 책은 쉽게 팔리지 않고 오래 팔렸으면 합니다.


저수지는 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 맨 아래에 자리 잡아야합니다. 나남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며, 

뒤따를 사람들을 위해 눈 덮인 광야를 어지러이 걷지 않겠다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나남은 이 마음 이 각오로 격을 잃지 않고 밝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책을 만들 것입니다. 

험하지만 희망을 쌓는 이 길에 아름다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파주에서 서명.png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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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산다> 제 2판 서문 

늙을수록 고귀해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손가락을 대면 파란 물감이 번질 것 같은 가을 하늘이 유난히 높던 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이 책을 2019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한다는 뉴스를 전했다. 명예만이 아니라, 다량 부수를 구입하여 도서관에 배포한다는 보상도 있다.  지난 4월 말, 나남출판 40년과 나남수목원 10년을 기념하여 출판되어, 그 사이 마음 속에 나무와 숲을 꿈꾸는 열성적인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부랴부랴 재판 발행을 서둘렀다.

 

나남 책들이 매년 몇 종씩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저자들과 그 기쁨을 같이했지만, 정작 발행인인 내 에세이가 문학 동네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이름 모를 어느 작가의 귀한 한 자리를 내가 뺏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05년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받아 문화예술인으로 정부의 공인을 받은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잔잔한 감동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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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의 어떤 가을날

 

 

나남수목원의 상징인 책박물관 앞 호수를 감싸 도는 둘레길을 완성했다. 길은 연이어져 새로 조성한 넓은 허브 꽃밭에 이르게 한다. 몇 년간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다. 넓어진 공간에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조금은 호사스럽다고 생각도 했지만 내친김에 산책길을 잔디로 덮었다. 이 길 중간에 손길이 쉽게 미치지 못했던 40년 넘는 반송이 이제야 바로 품에 들어온다. 수형을 바로잡는 전지작업으로 10년 동안 혼자서도 늠름하게 자랐던 외로움을 달래주고, 호수를 가슴에 품는 수호목으로의 위상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10년 전 수목원 조성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심었던 장송들의 밑둥을 헤치지 않으려고 두세 단 돌을 쌓고 작은 언덕 쪽에는 석축을 새로 쌓는 큰 공사였다. 호수가 더욱 넓게 보이며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고, 건너편 책박물관을 바라보는 그림이 새로 생겨났다. 실체는 다름이 없는데 서 있는 곳을 달리해 바라보면 이렇게 새로운 풍경이 드러난다. 조그마한 시각의 차이는 스스로 완벽하다는 오래된 묵은 생각들을 갑자기 뒤엎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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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박물관 앞 호숫가 반송

 

 

포천 산정호수 아래에 꿈꾸는 공간인 ‘한국현대일상문화박물관’을 찾았다. 나남수목원에 왔을 때 전해준 〈숲에 산다〉를 읽고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장동수 관장의 우정에 취해 그의 보물창고를 감상했다. 화폐 수집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일상문화의 흔적들을 그의 기억의 공간 속에 소롯하게 담아낸 평생의 집념이 존경스러웠다. 미쳐야 미친다는 또 하나의 현장이다. 몇 차례 수목원을 둘러보더니 호수에서 책박물관을 오르는 계단이 불편해 보인다며, 며칠 동안 뙤약볕 아래 손수 망치를 들고 현대건설 40년 고수의 손길로 천상에 이르는 멋진 작품을 선물한 속내 깊은 그이는 아름다운 괴짜인지도 모른다.

 

그이의 박물관 수장고 옆의 기품 있는 향나무를 탐냈더니 수목원에 있어야 할 나무라며 선선히 내준다. 달마상의 웃는 모습을 조각한 듯한 천연 바위도 함께 가져가라고 했다. 포천-구리 고속도로 공사 때 땅 속에서 캐낸 까만 바위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대형 크레인도 바위의 무게를 이기는 데 힘이 부친 듯 헤매는 이 바윗돌을 나남수목원에서 가장 잘 생긴 50년 넘는 느티나무 옆에 모셨다. 날렵한 수형을 자랑하는 향나무와 사각형의 나머지 바윗돌 3개는 호숫가에 앉혀 밋밋한 잔디밭 주변을 고풍스런 풍경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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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품있는 향나무가 날렵하게 안개 속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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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을 닮은 미소에 화답해 보자.

 
 
백송과 앵두나무 사이의 넓은 까만 바윗돌 위에는 하얀 대리석 좌대를 마련하여 10여 년 출판사 사무실에 갇혀 있던 짐바브웨의 세계적 쇼나조각가인 본지시Bonjisi의 〈바람부는 날〉 여인 조각상을 모셨다. 비로소 1억 년이 넘는 아프리카 특유의 스프링스톤에 새겨진 바람결에 휘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천사의 영감이나 여신의 존엄을 느끼면 인지부조화에 불안했던 세속의 성냄이나 우울함도 사라질 것이다. 분수가 있는 풍경 속에 동상처럼 서 봐도 좋다. 마침 새로 구입한 김영중 조각가의 〈여인〉 브론즈 조각상도 나무계단 옆 바윗돌 위에 마련한 대리석 좌대에 올려 키 큰 여인으로 보이게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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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의 세계적 쇼나조각가인 본지시Bonjisi의 〈바람부는 날〉 조각상

 

 

달마상의 미소와 두 조각상의 향기가 함께하여 잔디밭을 둘러싼 자연 갤러리의 얼개가 엮어진 것 같아 조그마한 평화가 왔다. 70이 넘어 외로움을 공유하는 벗들의 마음이 정직한 공간인 수목원에 하나씩 겹쳐지기 시작한 것 같다.

 

봄이 여름에게 자리를 내줄 무렵 1기갑여단 김창수 장군의 배려로 부사관 병력 20여 명이 대민 지원차 수목원 반송 전지작업을 도와주었다. 이 부대는 우수독서부대로 선정되기도 했고 부대도서관에 1천여 권의 나남 책을 기증하면서 우의를 맺었다. 덤으로 손자를 탱크에 탑승시켜 할아버지의 위상을 높여준 애서가愛書家인 김 장군은 나의 독서 파트너가 되었다. 전지작업 지원병력의 시범조교를 맡은 ‘이 상병’에게 배움을 얻었다. 그는 아버지가 큰 조경회사를 한다고 했다. 세상일은 도처에 크고 작은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함몰되어 눈을 크게 뜨지 못해 그 찰나를 놓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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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 가지치기한 반송들이 새봄에 새로운 얼굴로 반긴다. 새로 조성한 잔디밭 위라서인지 더욱 품격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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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십 년은 활개치며 자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 반송들이 늠름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13년 된 반송 3천 그루가 우리 수목원에 시집온 지 10년이 다 되어 이제 스무 살이 넘었다. 그동안 애지중지하며 잔가지를 다스렸는데, 이제는 무뚝뚝한 청년이 되어 강인함을 뽐내며 새카만 녹색의 위세로 나를 압도한다. 햇빛 길과 바람 길을 트여주지 않고서는 장마 때 병충해와 겨울 설해雪害를 견딜 것 같지 않았다. 해마다 전지하는 손길이 성장에 탄력이 붙은 이 녀석들을 따라가기 버거웠을 무렵이다.

 

‘이 상병’에게 배운 대로 이른바 “혹독한 반송 전지작업”을 시작했다. 7할 정도는 벗겨낸 모양이다. 제법 금강송 모습 같은 장딴지보다 굵은 알통도 드러났다. 이런 구조조정이라면 인간사에서는 비명소리가 하늘을 덮었을 것이다. 나무는 아무 말이 없다. 진한 솔향기 속에서 견뎌낼 만한 체력을 이미 예비하고 있다고 늠름해 하고 있다. 책박물관을 설계 시공한 후 5년 넘게 반송 전지작업을 같이하며 이제는 나무의 얼굴을 하나하나 알아보는 홍성천 건축가와, 나남 식구가 된 나무에 대한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은 김용태 주간과 함께 그렇게 한 해를 보내야 했다. 이제 이 녀석들이 다시 밥을 채울 때까지 한두 해는 전지가위로 부지런을 떨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친김에 수간거리를 생각해 정자 호수 앞 4백 그루를 키우는 시범단지의 반송 150그루를 뽑아 산등선 위쪽으로 널찍하게 이식했다. 분을 크게 떠서 옮기고, 차에 물을 싣고 곡예운전을 하고, 지형을 다시 다듬느라고 가을 한 달을 바쳤다. 시범단지에 남아 제자리를 찾은 나무들이 이제 서로 다투지 않고 앞으로 이삼십 년은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셈이다. 나무들이야 당연히 좋겠지만, 바라보는 나도 확 뚫린 공간이 주는 해방감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반송 아래에 벌개미취의 야생화 꽃궁궐을 만들겠다는 희망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 꽃들을 살리려다 보니 잡초제거에 품이 너무 많이 든다.

 

벌개미취는 가파른 경사면으로 옮겨 자생하도록 하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경사가 완만한 이곳은 잔디밭으로 꾸미고 싶었다애면글면하다가 금년 봄 2천 평 넘는 축구장 크기의 잔디밭을 만들었다몇 번이고 작은 돌들을 주워내고거름을 주고잡초들을 뽑아내는데 한여름을 보내면서도 힘들어 하지 않았다장쾌한 파란 잔디밭을 갖는 기쁨에 서너 차례 두세 시간씩 잔디 깎는 자동차를 모는 일은 내가 기꺼이 떠맡았다잔디밭 위에 용틀임하는 반송들이 갑자기 고급스러워 보인다거친 산야가 세련된 정원으로 탈바꿈한 것 같다확 트인 공간에서 활기찬 반송들을 그리며 반송밭 조성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시작한 것이다나머지 공간도 이렇게 정돈하려면 사오 년은 더 고생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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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키르케고르 좌상 옆에서 발견한 매끈한 숲의 귀부인인 자작나무의 밑둥

 

 

지난여름에는 아이들이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제국으로 칠순여행을 보내주었다. 노르웨이 숲에 원 없이 안겼다. 덴마크에서는 불우했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좌상 옆에 우뚝 선 50년이 넘는 자작나무의 우락부락한 밑둥이 눈에 띄었다. 자작나무 맞는가. 자작나무는 발끝에서 머리까지 하얀 몸통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생태계의 당연한 질서인데도 오랜 시간 자작나무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허당이 부끄러웠다.

 

새벽 산책길에서 예쁘게 꾸민 공원에서 마주친 무릎 높이의 주목나무 나무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감동을 빨리 우리 수목원에 옮기고 싶어, 지난가을 동네에서 구입한 10년생 주목 1천 그루를 무릎 높이로 잘라 수목원의 반송밭 길가를 나무담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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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밭 둘레에 주목나무로 나무담을 치기 시작했다.
 
 

 예춘호芮春浩 선생

 

2019년 6월, 구순이 넘은 예춘호 선생이 수목원을 찾아오셨다. 20년 전 김중배 대기자의 소개로 선생이 운영하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를 서초동 출판사 사무실에 삼사 년 같이 쓰게 해준 인연을 각별하게 생각하신다. 예 선생은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과 유신헌법 반대에 앞장선 보기 드문 지조와 신의의 정치인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재야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점에서 “거물 정치인들 테두리에 갇히지 않은 ‘지사'志士이자 ‘창조적 경계인’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자유인이었다”(한완상 평). 남 앞에 내세우지 않는 영도육영회를 통한 장학사업과 사회과학연구소 지원도 평생을 간다. 정계은퇴 후 용인에 은거하며 낚시와 서예로 세월을 낚으며 2012년에는 가장 존경하시던 정구영 선생의 평전 〈시대의 양심〉을 저술해 큰 숙제를 끝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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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수목원을 찾은 예춘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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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곰탕집에



 
인사동, 강남 곰탕집에서 가끔 뵙다가, 이억순 선배의 인도로 용인 댁을 자주 찾아뵙게 된 것은 예 선생이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지만 학 같은 삶이던 구순 주변, 많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나이 들어 처신을 바꾸는 사람들도 많아져 허탈한 마음이 쌓여가던 무렵이지 싶다. 

그때마다 수목원 조성을 당신 일처럼 격려하시며, 큰 나무에 연연하지 말고 부지런히 묘목을 심으라는 말씀도 여러 번 하셨다. 30년 전 은평구 기자촌 진관사 주변에  묘목을 심었던 백송 40그루를 선뜻 내주셔서 수목원 양지녘녁에 선생의 얼굴을 보듯 모시며 백송 같은 푸르름의 건강을 기원했다. 건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시다가 비로소 사모님, 막내아들과 오늘 수목원에 오신 것이다. 인수전 정자에 앉아 선생도 이런 수목원을 꿈꾸셨다며, 내가 이룩한 일들이 장하다고 당신 일처럼 그렇게 좋아하신다. 30여 년 전에 아버지를 잃은 나에게는 정이 뚝뚝 묻어나는 육친肉親의 그리움이 배어났지 싶다. 

예 선생의 붓글씨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필의 반열이다. 글씨가 그 사람이다. 몇 년 전부터 이백이나 두보의 한시를 내 이름을 넣어 여러 편을 하사하셨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8폭 병풍은 수목원 내 사무실을 선생의 올곧은 뜻으로 밝히는 북극성이 되었다. 

연말에는 국회에서 서예초대전을 가졌다. 주제는 有所不爲(유소불위)로 ‘하지 않는 일이 있은 뒤에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맹자)는 뜻이다. 그때 출품한 글씨 대여섯 편에 내 이름을 새겨 보내주셨다. 登高山望四海(등고산망사해)는 높은 산에 올라 온천하를 바라보는 대인의 늠름한 기상이 엿보이고, 吾道一以貫之(오도일이관지)는 나의 길은 흔들리지 말고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라고 읽히는 나에게 주는 인생훈으로 받아들였다.

虛心竹有低頭葉(허심죽유저두엽) 傲骨梅無仰面花(오골매무앙면화), 마음비운 대나무는 잎끝이 고개를 숙이고, 기개있는 매화는 꽃잎이 얼굴을 쳐들지 않는다는 겸손한 경지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양修養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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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쪼아댄 인수전 현판을 보시더니, 그것도 운치는 있다고 예 선생 특유의 웃음을 웃으시더니 이번 새봄에 새로 써주셨다. 이 ‘인수전仁壽殿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일부러 멋을 내지 않고 붓 가는 대로 별세하기 사흘 전에 쓴 봉은사의 ‘판전板殿이란 현판 같은 역사처럼 생각되었다.


예 선생은 몇 달 전부터 보고 싶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용인으로 불러 보셨다. 김준엽 총장님 돌아가실 때에도 이러했으니, 삿된 생각도 스쳤으나 30년 동안 출간된 7권의 저서들을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라는 제목을 붙인 1천 페이지 회고록 편집에 몰두했다. 열흘 전에도 “내 책을 갖고 싶었는데, 조 회장 고맙소!”라는 육성이 채찍질했기 때문이다. 제헌절 닷새 후 주무시듯 영면하셨다. 스스로 금강석 같은 절대고독을 선택한 이 시대의 거목巨木은 그렇게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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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쪼아댄 것을 보시고 예춘호 선생께서 새로 써 주신 인수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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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에 안착한 백송 40그루의 꼿꼿한 모습

 

 

가을이 깊어갈 즈음에 아름다운 수형의 50년 넘는 주목, 측백 등 큰 나무들이 수목원 새 식구가 되었다. 지나간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나무밖에 없다. 어디에 꽂아두어도 나무는 그 시간만큼 성장하겠지만 이제 나의 나무가 된 것이다. 그 세월의 나무들이 영생을 꿈꾸며 우리 수목원에 터를 잡았다. 8미터에 가까운 측백나무는 이웃동네의 상징목이었는데, 도로가 뚫리면서 옮겨왔다. 몇 년 동안 오며 가며 무척 탐냈던 나무가 동네사람들의 선의로 이제 내 품에 안겼다. 내 키의 세 배나 되는 우람한 주목나무와 절반 크기의 눈주목과 오랜 세월 분재처럼 다듬었던 단풍나무는 그 자리에 비닐하우스를 짓는다는 이웃동네 농부가 나의 나무 심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여 수목원으로의 이주를 승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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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식구가 된 주목나무와 눈주목나무. 거목을 옮겨 심은 기념으로 수목원 조용승 국장, 정현철 삼문회장과 나무 옆에 서서 높이를 가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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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더 허브 꽃밭의 상징목이 된 8미터 주변의 측백나무. 옆에 선 노란 옷을 입은 필자는 보일 듯 말 듯 거목 속에 묻혔다.

 

 

호수 둘레길에서 허브 꽃밭에 이르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공간을 지배하는 50년이 넘는 녹색의 내공에 갑자기 수목원이 활기를 띤다. 이 거목을 흔쾌히 시집보낸 이웃의 우정에 사나이의 삶은 이런 거라며 큰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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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마다 수목원 산책을 하던 정현철 삼문엔지니어링 회장이 수목원의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는 가로등을 진두지휘하여 심어주었다. 비밀의 정원에 걸맞는 요즘은 찾기 어려운 주물의 엔티크한 가로등이다. 책박물관까지 11불을 밝혀 수목원 3분의 1을 갑자기 광명천지로 만들었다. 10년 만에 수목원에서 한여름밤의 꿈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금년에는 반송전지작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도 밝히는 것을 보면 70 고개를 오르는 삶의 통찰의 순간순간, 그이의 넬라판타지아를 여기서 찾고 싶은 모양이다. 20년 넘게 지리산 자락 구례에 묻혀 살며 지리산 해돋이의 찬란한 순간을 계속 전하는 같은 또래의 구영회 후배도 그 빛으로 여기에 동참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이들을 볼 때마다 30년 전에 승천한 내 동생 상대相大가 생각나지만, 어떤 우정이 이런 적선積善으로 이끄는 것 같다.

          

지난 한 해는 출판사 일도 유별나게 바빴다. 아직도 출판 원고를 직접 보느냐는 새삼스런 질문에 “수목원 묘목 값이라도 벌어야지요”라고 응수하며 부지런을 떨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출판 40년의 활화산이 새로운 지평으로 치솟는 불기둥의 한가운데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침잠이 없다는 핑계로 확보한 직원들 출근 전 서너 시간의 고요함과 컴퓨터 화면의 따가움을 견뎌주는 두 눈의 고마움 덕택으로 그 많은 원고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우선 사회학회에 마지막 선물일 〈현대 사회학 이론〉(700p), 딸아이 주례선생였던 김영석 교수의 〈설득커뮤니케이션〉(700p), 언론학회의 〈한국 언론학연구 60년〉(610p), 그리고 〈최서면 회고록〉(1,300p), 송상현 회고록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1,200p) 등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눈에 띄는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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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성의 역사 ④ - 육체의 고백> 표지. (우) 미셸 푸코 일러스트(한겨레신문), 권범철 화백.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정을 바쳤던 책은 70 중반의 오생근 교수가 고독한 수도승처럼 혼신의 힘을 바쳐 완역한 미셸 푸코의 마지막 대작 〈성의 역사 ④ — 육체의 고백〉을 따라 읽으며 고통의 축제에 동참한 일이다. 두세 번 읽어가며 이 책에 공을 많이 들였다. 푸코 사후 34년 만인 2018년 2월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우리가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번역 출판했다. 인터넷에 독일의 주어캄프가 전자책으로 뒤따랐다는 소식이 떴다. 25년 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출판할 때의 아련한 감동의 대폭발이었다.

 

“푸코의 통찰은 진실의 언어화와 언어의 진실화로 요약되는 고백의 문제이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진실을 고백해야 하는 슬픈 육체의 변호인 역할을 통해 육체의 진실을 밝히려 했다”는 해제를 쓰는 내공이 깊은 전문가인 형과 어울려 춤추었던 지난 50년은 이 책으로 절정의 순간을 같이했다. 20년 전 〈토지〉 출간 때의 기억으로 이 책도 사전예약제를 실시했다. 40년 출판쟁이의 작은 자존심이었다. 출판이 갖는 당당한 사회적 신뢰와 지위를 인문사회 독자에게 물어 1천 명 고급독자의 뜨거운 반향도 받았다. 평생의 동반인 아내가 수목원에 정을 붙이기 시작하여 요즘은 나보다 더 열성적이다. 사진작품의 결실로 수목원 캘린더를 만들더니, 지난해에는 꽃무릇 군락지와 라벤더 허브 꽃밭을 당신의 허브 영토로 만드는 데 열정만이 아니라 숨겼던 거금을 쾌척하기도 한다. 이제는 정원을 가꾸는 놀라운 자연인의 기운이 하늘을 찌른다. 감사드릴 뿐이다. 많은 수목원 사진들을 디자인하여 이 책을 아름답게 꾸며준 이필숙 디자인실장의 고마움을 여기에 남긴다.

 

 

2020년 원단元旦

2020년 8월 1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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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산다> 초판 서문

세상 가장 큰 책


 

언론출판 40년이 되었다. 천둥벌거숭이인 젊은이가 지성의 열풍지대를 꿈꾸었다. 사상의 자유가 편견 없이 교통할 수 있는 그런 열린 공간이다. 지성知性과 야성野性의 조화라는 김상협 총장님의 취임사는 대학생이 되고서 처음 겪는 우레와 같은 지적 충격이었다. 이 화두로 열병을 앓는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나 지성은 아직도 칼집에 녹슬어 있고, 야성은 머리 깎인 삼손처럼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들 불꽃처럼 격렬하고 화려하게, 포연처럼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어느 시대나 격동의 시간이 아닌 때가 없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헤쳐 나온 거친 파도만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나도 다를 바 없다. 군사독재가 유신의 절정으로 치닫는 황량한 1970년대 초의 황무지 산비탈에 삽 한 자루만 들고 뛰어든 셈이다.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제적되었다고 해서, 직업선택의 자유가 박탈되었다고 해서 그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그 몸부림으로 출판을 통한 언론창달의 소명을 이루는 우회로를 찾았다. 어린나무를 심고 물을 줘가며 울창한 지성의 숲을 꿈꾸었다. 봉황이 깃을 칠 수 있는 그런 숲을 만들고 싶었다. 손주 대에나 과실을 얻을 수 있다는 독림가篤林家의 자세로 나의 길을 40년을 간다. 

 

책 속에서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땀 냄새에 취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고 책다운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자기암시로 견뎌낸 시간들이었다. 출판을 통해 어떤 권력에도 꺾이지 않고 정의의 강처럼 한국사회의 밑바닥을 뜨거운 들불처럼 흐르는 어떤 힘의 주체를 그려보고자 했다. “나남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듭니다”라는 창업의 깃발은 “나남출판사의 책은 쉽게 팔리지 않고 오래 팔립니다”라는 사훈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창공에 휘날린다.

 

나남출판이라는 지성의 저수지를 어떤 세파에도 무너지지 않게 튼튼하게 쌓으려면 먼저 낮은 곳에 임하는 겸손을 배워야 했다. 따르고 싶은 올곧은 선배들을 저자로 많이 모실 수 있는 행운도 같이했다. 나는 간이역의 외로운 역장 노릇이라도 충실히 했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나남출판이라는 자유의 광장을 지나갔다. 길을 묻던 사람들에게도, 늠름하게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과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장엄하고 처절한 계절에 세월을 자맥질하는 해녀처럼 허기지고 고독한 승리를 찾아야 했다.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는 욕망과 갈등의 자포자기도 있었다. 황야의 고독한 늑대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쓰다 신물이 나면 퉁소를 불고, 생솔가지 낙엽 타는 내음에 묻혔다가, 꽃 피는 소리 비바람 냄새에 마음을 닦고 살고픈 소롯한 꿈이 내게는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치열한 자본주의의 상업성을 함께 가져야 하는 ‘문화와 경영’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로 가슴앓이하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나남출판은 내 스스로의 자연채무를 갚는 마음으로 출판의 창을 통해서 한국사회를 인식해 가는 작은 기록이며, 어쩌면 칭기즈칸의 말채찍을 빌려 지적 유배의 어두운 동굴을 박차고 나가고픈 자기 입증의 궤적일지도 모른다. 

 

진흙 밭에 연꽃을 피우자는 꿈도 아니었는데 세상에 없는 것을 찾기 위해 그렇게도 함께 고민하며 뒹굴었던 3천 명 넘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동행한 출판의 대장정大長征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출판의 길이 아니었다면 만나 뵐 수 없었던 북극성北極星 같은 분들을 모신 행운도 많았다. 원고 하나하나를 눈이 시리도록 읽어내는 고행苦行은 내가 자초한 길이었음에도 그분들은 질풍노도의 용광로에서 촌스러움의 껍질을 거듭거듭 벗어나는 나의 성장을 이끈 바로 스승들이었다.

 

20년 가까이 지훈상芝薰賞으로 기리는 조지훈 선생님, 삶의 통찰을 주신 비화밀교의 이청준 소설가, 젊은 날의 우리 대장 김지하 시인, 언론출판의 길을 밝혀주신 명칼럼니스트 김중배 대기자, 동굴 속의 독백을 웅변으로 승화한 영원한 스승 리영희 선생님, 사반세기 또다른 장정을 같이한 마지막 광복군復軍 김준엽 고대 총장님, 독일 통일 현장에서 유럽에 눈 뜨게 한 김형국 교수, 고난의 최전방 방책선에서 가야할 길의 좌표를 주고 지금도 미셸 푸코에 대한 열정으로 나를 보살펴 주는 오생근 형님, 언론학 출판의 기틀을 잡아준 오택섭 교수를 비롯한 강현두, 최정호, 이강수 교수, 사회복지학 출판을 개척해준 최일섭 교수, 인간의 자아실현과 미래의 선택에 탁견을 가진 교육학의 정범모 총장님, 자본주의에 훼손당한 인간적 가치를 되찾고 역사적 물결 속에서 주체적으로 서기 위한 〈사회비평〉 동인인 송호근, 염재호, 김용학 교수들이 그분들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장편소설 〈토지〉를 통해서는 미친 세월이었던 산업화시대를 물불을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 도시인의 소시민적 안락을 확보한 이들에게 생명의 강에서 불꽃을 태우기를 권유해야 했다. 그것이 거미줄로 만든 그네를 타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출판 창업 25년 만에 2백만 부 넘는밀리언셀러를 경험한다. 이 선량한 자본으로 출판사가 안주할 지훈빌딩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고, 수많은 가난한 사회과학자들의 저서가 출판될 수 있었다.

 

이제는 포천 신북의 20만 평 수목원에 3천여 그루의 아름다운 반송盤松과 1만 주 넘는 자작나무숲을 가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출판 본업을 지키고 세속권력의 유혹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어쩌면 책은 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지구의 소풍이 끝나면 어느 별로 돌아가겠지만, 곱게 늙어가는 나무는 수백 년 지구의 주인답게 이 자리를 지킨다. 수목원 안에 자리 잡은 이 시대의 지적 성과로 자부하는 책박물관의 나남 책들이 그 시간만큼 형체를 보전할지는 모를 일이다. 

 

수목원을 시작한 것이 퇴계退溪처럼 나이 들어 스스로 은거하는 만은晩隱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수목원은 세속의 크고 작은 유혹을 견뎌내고 나 자신을 지키며 숨 쉴 수 있는 출구였다. 가끔은 천둥벌거숭이 아마추어가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를 이룬다고도 한다. 20년 가까이 준비한 수목원의 장관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의 도시적 상상력을 유쾌하게 배반할 수 있는 규모의 광폭성보다, 이를 부둥켜 앉고 몸부림친 나의 열정을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생태계의 숲을 만든다. 세상에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도 나무처럼 늙고 싶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면 나무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나무처럼 사는 첫걸음은 뜻하는 처음의 입지立志를 이루는 일에 전념하는 일이다. 그리고 주변의 사사로운 관심에 초연해야 한다. 이제 이만큼 이루었다는 자만自慢에 잘난 척하고 싶고 속된 여유를 부리고 싶은 유혹을 떨쳐야 한다. 그 절대고독에 익숙해야 한다. 그리고 가 보지 않은 길을 늠름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그것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거나 그 자체 존재만으로도 천 년의 고독을 견딜 나무의 덕성이다.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알몸으로 이겨낸 뒤에 얻어질 초월超越과 해탈解脫을 위해서라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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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수목원 책박물관 앞 호수


 

40년 동안 나남출판을 통해 지성의 향기를 나누었다면, 이제는 나남수목원으로 생명을 가꾸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을 만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어느 나무 밑에 묻힐 때까지 이 길을 가야 한다. 5년 전 한겨울 서설瑞雪을 찾아 수목원의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동행했던 임병걸 시인이 〈세상 가장 큰 책〉이라는 시를 즉석에서 선물했다. 퇴계는 자신의 묘비명을 제자나 지인이 쓸 경우, 꾸미고 과장되게 지어 부끄러울까 싶어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나는 임병걸 시인의 영감을 나의 묘비명으로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겠다며 이 시를 다시 읽는다.


 

세상을 향해 종이 위에 침묵의 말 건네던 사람

언제부턴가 더 큰 침묵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돌멩이로 모음을 쓰고 나뭇가지로 자음을 썼다

흐르는 계곡의 물과 능선을 넘어온 바람으로

줄거리를 만들었다

 

책은 나무가 산고 끝에 잉태한 아들

평생 책의 아들이었던 그는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 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때 구상나무 심고

세상이 그리울 때 빠알간 복자기 심었다

세상이 답답할 때는 쭉쭉 뻗는 낙엽송 심었고

세상에 고함치고 싶을 때는 활활 타오르는 자작나무 심었다

 

때로 그를 시샘한 세상이

폭우를 쏟아 부어 나무를 덮칠 때는

뒹굴던 돌을 쌓아 세상의 역류를 막고

흔들리는 마음 단단히 가두었다

 

마침내 세상 가장 큰 책을 쓰고는

흙 묻은 등산화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그도

한 그루 느티나무 되어 책 속의 쉼표로 찍혔다

겨울에도 푸른 쉼표로.

 

- 임병걸 시인(2013)


 

2019년은 나남출판 창립 40주년이며, 수목원 설립 10년, ‘지훈상’ 창설 20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이 70을 자축하고 싶은 인간적 욕망을 감출 수 없었다. 이를 기념하는 마음으로 이 책 〈숲에 산다〉를 발행한다. 20년 전인 1999년 박사논문을 책으로 풀어서 펴낸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이 나의 첫 책이다. 이 책 〈숲에 산다〉는 10년 전 나남출판 30주년을 기념하며 회갑 무렵에 펴낸 〈언론 의병장의 꿈〉과, 수목원의 꿈이 영글어가던 5년 전 아름다운 숲을 꿈꾸며 펴낸 〈나무 심는 마음〉의 연장선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은 손으로 만지거나 가슴에 품을 수 없는 나무들의 합창인 숲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이 그것이다. 두 책의 서문을 다시 읽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 글 뒤에 붙은 “언론 의병장의 꿈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하여”와 “꿈꾸는 나무들, 수목원의 탄생”이 그것으로,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또 관찰 기록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나남수목원에 살고 있는 나무, 꽃들에 대한 정보와 감상들을 모은 〈나남수목원 식물도감〉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나의 마지막 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두 해 동안 칼럼 집필의 기회를 준 〈한국일보〉 “삶과 문화” 와 〈문화일보〉 “살며 생각하며”에 감사드린다. 나의 글을 좋아한다는 이계성, 김종호 논설위원의 우정에 보답한 것인지도 모른다. 데드라인을 지키라는 원고청탁의 강권이 없었다면 그동안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단상斷想들이 언어로 정제되지 못하고 그냥 숲속에 묻혔으리라 싶기에 더욱 그러하다.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스물네 번의 숙제를 하는 동안, 칼럼원고를 미리 읽어준 출판사 고승철 사장, 방순영 이사, 신윤섭 부장에게 감사한다. 수목원을 가꾸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사람사는 모습에 녹여낸 글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때는 시간에 쫓겨 아등바등 헤맨 글도 많다. 신문에 칼럼이 나간 다음에 계속되는 연상聯想까지 숙성시켜 두세 배 넘게 정리한 글들을 제 1부에 실었다. 

 

제 2부의 ‘첫 독서, 책에 눈뜰 무렵’, ‘글에 눈뜰 무렵’, ‘기억의 장소들’, ‘작은 기록의 시간들’은 조각보자기의 흩어진 조각을 맞추듯 정리하여 나를 객관화시켰다. 40년 전의 우연한 메모 한 줄을 껴안고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무망無望의 노력도 여러 차례였다. 낡은 일기장의 짧은 단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지웠다가도 그것도 나의 성장과정의 정직한 부분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되살리기도 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심중에 남아 있던 다 못한 말들이 얽혀진 작은 자서전이 된 느낌이다.

 

가까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라고 해도, 어떤 부분은 지금의 나의 관점으로 덧붙이거나 색칠되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날을 회상하다 보면 시제를 넘나들기도 하고 어떤 주제도 딱히 찾을 수 없는 내용에서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모든 조각들이 모여 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기억들을 발효시켜 두세 달 동안 집중하여 새로운 원고를 쓰는 시간들은 행복했다.

 

제 3부에는 강천석, 염재호, 송호근, 윤기호, 고승철 형의 발문을 실었다. 사반세기 함께한 방순영 출판사 편집장이 눈치 빠르게 나도 모르게 강권하여 받은 원고들이다. 내게는 과분한 선물이어서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과 함께 사는 세상이었으므로 살 만했던 것이다. 사나이들이 마음 속 깊이 감춰둔 활화산 같은 애정은 이런 것이지 싶다. 자신을 어떻게 알랴마는 이들이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끄집어낸 나의 에피소드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나를 객관화시켜 준 뜨거운 우정에 감사드린다. 덕불고德不孤 필유인必有隣의 기쁨이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경必有慶인 셈이다. 

 

책박물관 개관 무렵 수목원을 취재한 〈문화일보〉 장재선 시인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긴 글(사진, 김호웅 기자)과 파주나남사옥을 취재한 〈경향신문〉 한윤정 기자의 ‘집이 사람이다’(사진, 박기호 사진가)를 공유했으면 싶어 여기에 같이 실었다. 


 

2019년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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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의병장의 꿈〉 서문

언론 의병장의 꿈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삶의 시간을 어떤 단위로 나누는 일은 고비마다의 매듭을 정해보고 싶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몸짓일지 모른다. 잠깐의 숨 고르기를 위해서거나, 스스로의 의미부여이거나, 문득 소외되지 않았음의 확인이거나가 그것일 것이다. 

 

2009년 5월은 나남출판사가 창립된 지 30주년이 된다. 자축도 하고 싶고, 널리 알려 축하도 받고 싶은 마음은 한이 없었다. 그러나 이 일들이 갑자기 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출판 30년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하는 생각과, 요즘 들어 하나의 사기업에 불과한 우리 출판사가 어쩌면 얼마만큼은 공적 영역에 자리한 게 아닌가 하는 겸손까지 겹치는 생각 때문이어서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박한 회사 살림형편에도 뜻만을 살려 운영해온 〈지훈상〉이 벌써 공평무사하게 10년이 되어 아름다운 권위라도 세운 듯하고, 한국연구재단 명저 번역사업에 국가기관보다 내가 더 제작비를 부담하여 1백 권을 목표로 80여 권이 3년째 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창립 30주년과 나의 60 회갑을 기리자며 이제까지 여기저기에 발표한 내 글을 찾아내 편집하는데 먼저 여러 선생들에게 청탁했던 원고가 들어왔다. 김형국, 송호근, 김민환, 김인환, 오생근 선생들의 정성어린 글이 그것이다. 나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이렇게 긴 글을 주신 데에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자긍심과 함께 마음이 바빠졌다. 잉크냄새와 활자에 중독된 나의 속세의 욕망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증명하듯 이 책을 꾸미는 일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글은 유한한 존재를 무한의 세계로 끌어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미 발표한 글들이 대부분이고 신문 인터뷰기사를 모으기도 했는데 꼭 책으로 내야 하는가 하고 망설이다가 축하원고를 보내주신 선생의 글들에 대한 예의에서라도 이 책 절반 이상의 글을 새로 쓰면서 여름 한 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박경리, 이청준 선생에 대해서는 긴 글이 되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출간에 대한 전 과정의 글에는 나의 ‘출판하는 마음’을 정직하게 털어 놓았다. 후학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함보다 나의 50 주변의 모든 삶을 쥐어짜낸 기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청준 선생을 통해서는 그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지혜를 공부한 셈이다. 10년의 시차는 있지만 동향 출신이라는 지地緣으로 가슴 터놓고 군부독재 시대를 같이 고민했던 시간만이라도 행복했다. 

 

아무래도 인간관계의 연속들이 혼자 살 수 없는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또는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을 시시콜콜 기록하여 공개함으로써 그 열정을 간직한 채 계속 타오르는 불꽃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1989년 나남 10주년 기념은 ‘나남신서 1백 호 기념’과 같이했다. 10년 동안 출판사로 버텨낸 것과 언론학 전문도서를 1백 권이나 낸 것을 자축하고 싶었다. 프레스센터의 기념식장에서는 젊은 출판장이의 열정을 축하하면서도 역마살이 낀 저이가 저 일을 계속할까 하는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았다. 나는 나남신서 1천 호, 5천 호의 위업도 달성할 수 있을 터이니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호기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더 지나면 나남신서는 벌써 2천 5백 호를 넘어서고 있다. 

 

1994년 창립 15주년 기념은 강남 서초동 사옥 마련과 함께 첫번째 사옥의 집들이와 겸했다. 기뻤다. 번듯한 내 집을 마련한 것이다. 지하철 양재역과도 가까워 저자들이 출입하기도 편리해졌고 넓은 공간의 여유로움은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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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아내, 김경동 서울대 교수, 필자, 홍일식 고려대 총장, 박맹호 민음사 사장, 이강수 한양대 교수, 김중배 동아일보 논설위원


 

1995년에는 파주 통일동산에서 금촌 가는 길에 다산출판사 강희일 사장 등과 4천 평의 부지에 1천 5백 평의 현대출판유통을 설립하여 이젠 창고 이사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이렇게 사옥과 창고문제를 해결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출판사 뒷집의 영감님이 상속문제 때문이라며 1백 평의 땅을 떠넘겨 주었다. 힘겹게 증축공사를 마쳐 대지 2백 평, 건평 9백 평의 지훈빌딩이 되었다. 자금사정도 빠듯하고 일할 시간도 벌 겸, 맨 꼭대기층은 이른바 펜트하우스 흉내를 내서 한두 해 살림집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곳은 35년 전 대학 2학년 때 내 인생을 바꾼 광주廣州 대단지 사건을 취재하러 동대문운동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가던 흙먼지 이는 신작로 길가의 논밭이었던 말죽거리 그곳이 아닌가. 참 운명이다 싶었다.

 

번듯한 사옥을 완성하고 한숨 돌리려던 차에 맞은 IMF 외환위기로 머리가 하애졌다. 출판을 처음 시작하던 1979년 가을 새벽에 배달된 대통령 피살의 조간신문을 펴들 때 받은 충격은 비할 바도 아니었다. 어느덧 부양할 가족이 20여 명이 넘는 중소기업 사장이 되어 있어 어깨가 무거웠다. 멀쩡한 담보대출을 현금확보라는 미명으로 상환을 독촉하며 고율의 대출이자를 강요하는 하이에나 같은 은행에게 시달리고, 날마다 터지는 도매상과 서점 부도의 악령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래서 6・25 전쟁과 이 외환위기를 극복한 사업가는 믿어도 된다는 말도 생겼다.

 

새천년이 시작하기 직전인 1999년, 창립 20주년은 계간 〈사회비평〉 10주년과 ‘나남신서 7백 번’으로 낸 내 책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출판기념을 겸하였다.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 모인 저자분들이며 좋은 선배들인 6백 여 명의 하객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나남’과 어떤 사이냐며 기분 좋은 관계확인에 바빴다. 출판으로 얽혔지만 휴먼 네트워크의 질과 양이 이렇게 광대무변할 수 있음을 웅변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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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나남출판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한만년 일조각 사장, 어머니, 아내, 필자, 김중배 대기자와 함께.

 

 

항상 부러워했던 일본 광고기획사 덴츠電通의 신년하례식처럼 민간의 힘에 의해 이 시대 지성을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한 것 같은 절반의 성공에 스스로 감동했다. 대성황을 이룬 하객들 앞에서 언론으로서의 출판과 출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누누이 강조한 것은 이젠 피할 수 없는 출판장이로서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2004년은 창립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창립기념식 행사를 대신하여 6개월 동안 고생하여 목침 같은 46배판 1,120페이지 책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4반세기〉 를 발간하였다. 여느 출판사도 시도해 보지 않은 2천여 권의 총 도서목록과 해제를 실었다. 인쇄매체의 기록성을 담보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으나 6개월에 걸친 시간과 물량의 투입이 너무 힘들었다. 발간 도서의 집대성은 흐뭇했으나 에 낀 티와 같은 책도 많았다. 엄격하게 정선精選하지 못한 안목과 치열한 자기검열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빠른 정보검색을 위해 CD도 별도로 제작하였으나 굳이 큰 책으로 출판한 것은 책이 갖는 공간성의 의미와 함께 내 분신인 양 쓰다듬고 싶은 값비싼 허영도 있었으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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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25주년 기념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4반세기〉


 

2004년은 파주 교하의 출판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 하류의 기름진 퇴적층의 언저리로 한강이 임진강의 물과 만나 강화도를 돌아 망망대해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동업계 동무들도 사옥을 마련하여 1백여 개사가 도란도란 입주했다. 근 20년의 강남 서초동 시대를 마감하고 이 벌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550평의 부지에 세운 850평의 거탑巨塔이다. 비효율적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지하 2층 깊이의 넓은 창고도 같이 마련하여 흔들리지 않을 출판사의 기틀을 잡았다. 갈대 수로의 풍경과 함께 부드러운 곡선의 커다랗게 휘어진 바람의 벽을 두른 독특한 아름다운 모습의 사옥은 자유혼의 디자이너인 친구 김영섭의 설계이다.

 

사옥을 장송長松으로 띠를 두르고 자작나무의 작은 숲도 마련했다. 넓은 바람의 벽에는 담쟁이를 올렸더니 벌써 절반 이상을 덮고 있다. 교통시간을 생각해서 별도로 서울 지사를 마련할까도 생각했지만, 꿀을 찾는 벌을 불러들일 문화의 진한 꽃향기가 이 거리 정도는 극복하지 않겠느냐는 고집으로 경기북도 시골인 심학산尋鶴山 자락의 자유로自由路 연변인 여기에 올인했다. 새로운 땅이기도 했고, 이제는 또 출판사 사옥을 옮기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 같아 지신地神 밟기도 할 겸 1년 넘게 사장실 옆에 요사寮舍채를 만들어 숙식을 같이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이제 나남창립 30주년이 되었다. 처음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편견 없는 열린 광장의 지성의 열풍지대의 숲은 얼마나 갖추어졌는지 모르겠다. 숲이 무성해야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고 내려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남’이라는 지적知的 저수지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의 맑은 물을 얼마나 받아들여 이를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성과 차이를 포용하는 해납백천海納百川의 나남출판이라는 용광로는 자유의 활화산으로 지금도 용솟음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또 하나의 30년을 준비하는 푸르른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라도 지난 삶의 궤적을 다잡아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 책 〈언론 의병장의 꿈: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30년〉 을 엮으면서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본 지난 날의 글은 삶의 향기보다는 출판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려는 치열한 몸짓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의 성장통成長痛의 흔적들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팍팍함 때문인지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는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자기검열의 엄격한 잣대도 보이고,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적의도 잘 숨기질 못해 들키는 생경함도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호기롭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30년 동안 이러한 주장의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절반이나 실천하였을까 싶다.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향에 몸을 숨기고 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출판사 일 틈틈이 시간을 쪼개 포천 신북에 20만 평의 ‘나남수목원’을 만들고 있다. 양지 바른 곳에 수목장樹木葬으로 사용해도 좋을 3천 그루의 12년생 반송도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는 스스로에게 전율戰慄을 느낀다. 그래서 나남출판 35년이 되는 내년에 기념품으로 출간할 에세이집을 〈나무 심는 마음〉 이라고 먼저 제목부터 미리 정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30년이었다. 5년 전 주역周易 공부를 하면서 남동원南東園 스승께서 나에게 주신 호가 ‘구원’衢園이었다. 대축大畜 괘의 ‘何天之衢 道大行也’의 뜻을 주신 것이다. ‘何天之衢(하천지구)는 천상의 사통팔달하고 무애무변无涯無邊한 도를 짊어지다, 또는 완성한다는 너무 큰 뜻에 다름 아니다. 

 

내가 꿈꾸는 언론 의병장의 꿈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


 

2009년 삽상한 가을바람의 얼굴을 보며 서문을 쓰고,

 2013년 늦은 가을날에 제 2판 서문을 덧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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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심는 마음〉 서문

꿈꾸는 나무들, 수목원의 탄생

 

 

벌써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양재역 앞 서초동에 지훈빌딩을 마련하여 출판사를 할 무렵 5층 계단에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책 출판의 답례로 누군가에게 받은 글씨였지 싶다. 그때까지도 세상과 편하지 않았던지 세상과 불화할 때마다 이 글귀가 위안이 되었다. 앞부분은 卽時現金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이다. 

 

강파른 세월에 생각만 앞서지 보여줄 것도 없이 소인배人輩들 틈에서 대인大人의 꿈이라도 펼쳐 보이려면 얼마나 냉혹하게 자신을 살피고 독려해야 하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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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을 통해 들불처럼 타오르는 지성의 열풍지대를 창조하기 위해서라도 사무실 벽에 걸린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액자 자강불식自彊不息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보낸 세월이 스스로 언론출판의 뜻을 세우고 헤쳐나간 40년이 다 되는 장엄한 계절이었다. 이 책의 ‘미친 세월 뛰어넘기’라는 에세이는 그 무렵에 생각의 싹이 텄는지 모른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갈월리에 20만 평의 나남수목원을 꾸미는 것은 내가 지구별에서 가까운 미래에 소풍을 마치고 떠나면서 이곳에 왔던 흔적으로 사람들에게 녹색공간을 남겨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그 수목원에 아름다운 책박물관을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40년 가까이 지성의 열풍지대에서 꿈과 땀으로 일구었던 일업일생의 책들을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담아둘 공간이었으면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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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 동산 앞의 3칸 정자 인수전


 

수목원 탄생의 거친 숨결이 10년째로 접어들었다. 수목원을 시작하며 생각했던 3천 그루의 반송盤松 동산 앞에 3칸짜리 6평 정자도 5년 만에 지어 잠시 햇볕 피할 공간도 마련했다. 정자 이름을 직접 써 붙이고 싶었으나 몇 번이나 망설였다. 글귀가 마음에 들어 인사동에서 구입한 현판 ‘인수전’仁壽殿을 처마 밑에 걸었다. 이제부터라도 어질게 살자는 다짐이기도 했다. 대들보 뒷편에는 웅장한 기개를 보인 한말 항일운동을 펼친 윤용구 선생의 ‘기장산하’氣壯山河 현판을 걸었다. 

 

잠시 뒤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는지 벌써 생태계의 거대한 질서의 운항을 조금이라도 눈치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가끔씩 그때 알았더라면 이런 시행착오는 하지 않았을 거라는 열정만 앞선 아마추어가 갖는 푸념도 섞인다. 20년을 준비했다는 나무심기의 내공도 책상물림의 교만이거나 허영일 수도 있다는 자책이다. 그러나 편견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무모함으로 가끔은 아마추어가 세상을 뒤흔드는 업적도 이룬다는 생각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자기최면을 공고히 하고 고통을 축제로 여겨야 그만큼이라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20만여 평의 수목원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꿈꾸며 첫 삽을 든 지 3년 만인 2011년 여름, 백 년 만의 폭우로 일어난 산사태가 묘목밭 5천 그루와 골짜기 1킬로미터를 초토화시켰다. 황폐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불 탄 자리는 흔적이라도 있지만 물난리 뒤끝은 허망함뿐이었다. 그때 그만 손을 들어야 했지만 생명에 대한 애착이 훨씬 컸는지도 모른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수해복구를 하느라 반년 가까이 작은 봉우리 하나를 들어내 석축을 튼튼하게 쌓고 흙을 다시 메웠다. 또 다른 폭우를 대비하며 산 중턱에 사방댐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넓은 호수를 두 곳에 만들었다. 나중에 양수기로 물을 퍼 올려 나무를 심는 데 필요한 저수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두 해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물난리로 깊이 패인 계곡 양쪽의 작은 산줄기를 허물어 계곡을 메꿨다. 이제 완만한 경사의 3만 평이 되는 공지가 생겼다. 나무를 심어야 했다. 2013년 합천댐의 담수로 수몰위기에 놓인 13년생 반송盤松 5백 그루를 이곳에 옮겨 살리면서 반송과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두 해 동안 비슷한 동무들을 합천, 고성, 원주에서 찾아내 이제는 3천 그루가 넘는 소문난 대규모 반송밭이 되었다.

 

2014년 가을에는 나무농사가 지겹다는 옆 동네 농부의 선의善意로 20년을 키운 은행나무 4백 그루를 건네받았다. 한 20년 넓은 수목원의 햇볕과 바람만 먹고도 거목으로 자라 노란 은행나무의 고즈넉한 낙엽길을 환상처럼 만들 것으로 상상한다. 아내가 바라는 기억 속의 숲길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마침 한탄강댐을 만들면서 물에 잠기는, 그 동네의 사당나무 역할을 했던 80년이 넘는 거목인 느티나무 일곱 그루를 어렵게 이식해야 했다. 수형이 너무 아름다워 생채기를 덜 내고 옮기느라 비용도 많이 들고 힘도 몇 곱절 더 들었지만, 영생할 생명을 내가 건져냈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2015년 수목원의 봄은 산벚나무의 꽃그늘만이 아니라도 유별나게 포근하게 안기었다. 50년간 나무를 가꾸었던 수목원 근처의 문중 땅을 개발한다면서 내놓은, 3백 그루 넘는 4〜50년 잘 자란 나무들이 두 달에 걸친 힘든 이식작업으로 우리 수목원의 새 식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대로 곧게 자란 라일락, 선비목이라는 회화나무들, 다 자란 보리수, 수해로 죽은 1백 년 산뽕나무의 후계목이 될 70년은 족히 넘을 건장한 산뽕나무, 귀한 오엽송들, 성목이 된 우람한 자귀나무와 귀룽나무들, 수형이 예쁜 측백나무와 향나무들, 그리고 오랜 시간 키워야 하는 눈주목 1백 그루와 회양목들, 장년이 된 느티나무와 단풍나무들이 그들이다. 가장 반가웠던 나무는 가장 더디 자란다는 구상나무와 종비나무 10그루를 품에 안은 것이다.

 

2015년 늦가을에 석인石人 30분이 수목원 식구가 되었다. 모두 2백 년이 넘는 문화재급인 문인석文人石들이다. 옛돌박물관을 설립한 천신일 회장님의 배려로 호숫가 돌담장 앞에 모셨다. 수목원 시작 때부터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3천 그루 반송의 위풍당당한 위세를 그렇게 좋아하셨다.

 

문인석은 묘소를 수호하는 석물로 앞쪽의 좌우에 배치된다. 공복公服을 입은 상태로 복두幞頭를 쓰고 홀을 들고 있다. 공복은 임금을 알현할 때나 동지, 설날 등 경사스럽고 즐거운 대사가 있을 때 착용하는 관복이다. 복두는 두 단으로 각이 진 관모로 사모의 전신이다. 홀은 신하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으로 상아나 나무로 만들었다. 

 

3칸 정자 인수전仁壽殿 옆에는 불을 밝힘으로서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으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에 버금가는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석등까지 모셨다. 공간을 지배하는 석등의 아우라는 훨씬 크게 다가온다.

 

잔디밭과 고졸古拙한 3칸 정자, 우람한 석등, 큰 나무들, 넓은 호수, 도열한 문인석들, 길다란 돌담장, 그리고 3천 그루의 반송이 만들어내는 3만 평의 공간은 품위있는 왕릉王陵의 풍경으로 비쳤다. 저 어느 나무 밑에 나무처럼 살다 영면하는 평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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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전 옆에는 불을 밝혀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석등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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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30여 분이 맡는 가을의 향기는 무엇일까?


 

2016년에는 책박물관, 관리동 증축공사가 끝났다. 관리동에는 산사山寺의 요사채처럼 숙식을 하며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12평짜리 6칸의 고급 원룸을 더 지었다. 전체 526평이 되었다. 꼭 5년 만의 역사役事였다. 두 차례에 걸쳐 강남 아파트 두 채 값이 들었다. 그 돈이 어디서 충당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쏟아 부은 열정만큼 나이도 들었다. 내가 여기까지는 완성해야겠다는 마음만 앞선 것 같다. 홍성천 교수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설계하고 시공을 감독했다. 설계사무소와 자원봉사하는 어린이 건축학교 일에도 바쁠 텐데 그이는 지금도 토요일이면 나와 함께 정성을 다해 수목원 나무를 가꾸는 붙박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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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 나남 책박물관의 고즈넉한 풍경이다.


 

2017년 5월에는 책박물관의 넓은 홀에서 개관식과 함께 17년째 이어오는 지훈상芝薰賞 수여식을 함께 했다.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어려운 고비마다 격려해 주신, 이제는 나들이가 쉽지 않은 팔순이 넘은 선배님들이 먼 길을 오셔 축하해 주며 오늘의 성취를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한 분 한 분 소개하며 나와의 인연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수목원의 푸르름처럼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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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박물관 내부. 강현두・김세원 교수 내외와 감동을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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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지훈상 시상식이 나남수목원 책박물관에서 열렸다. 하객 소개에 영원히 젊은 대기자 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이 인사하고 있다. 


 

작년 여름에는 구리-포천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서울에서 수목원 오는 길이 절반이나 가까워졌다. 3년째 공사하던 수목원 진입로도 금년 6월에 완공되었다. 굽이굽이 새마을 길이 큰길에서 곧게 뚫린 5백 미터의 탄탄대로로 환골탈태했다. 30년 전 만난 젊은 사무관이었던 고려대 띠동갑 후배와의 우정이 이런 큰 선물로 꽃을 피웠다. 덕불고德不孤 필유인必有隣의 경지는 한참 부족하지만 살아볼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고 자위해 본다. 

 

공간은 직접 발길이 닿는 만큼 확장된다. 수목원 조성 초기부터 생각만 하다 미루었던 수목원 초입의 풀에 덮인 작은 골짜기를 메운 공간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계단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지만 변경邊境의 소외된 땅이 양지바른 넓은 공간으로 나타나 가슴 뿌듯했다. 이 길로 야생화 밭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게 주변도 정리했다. 

 

새로 생긴 공간에는 10년이 훨씬 넘는 블루베리와 아로니아를 50그루씩 심었다. 아로니아는 이제 수목원에 9백 그루를 넘게 되었다. 달콤한 블루베리 열매는 산새와 내가 절반씩 나눠먹는 셈이다. 아로니아는 한여름 갈증을 치유하는 농부의 강장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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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면 야생화밭 앞의 블루베리와 아로니아 50그루를 만나게 된다.


 

2018년 봄은 수목원에 새 식구가 부쩍 늘었다. 재원조달에 힘겨워하는 나에게 나무 욕심을 그만 부리라는 아내의 지청구에도 나무 사랑을 핑계로 또 일을 벌였다. 지난 가을에 이식작업을 미리 해 두었던 포천의 40년 된 우람한 주목 120그루와 일동의 20년생 반송 80그루를 반송밭에 옮겨 심었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그 공간에 의젓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가슴 뿌듯했다. 손길이 많이 간 주목 120그루와, 가지를 밑에서부터 받아 수형이 예쁜 포천 송우리의 30년생 산수유 1백 그루도 이식했다.

 

〈나무 심는 마음〉이라는 책 제목은 나무를 닮고 싶고, 나무처럼 늙고 싶고, 영원히 나무 밑에 묻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같이하고 싶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삶을 지배하는 걸까. 그리고 실천하게 하는 걸까. 이성을 가진 합리성을 넘어서는 감성이나 직관이 따로 나의 주인 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제 3부 ‘자신을 찾는 여행’은 바이칼, 터키, 스페인 기행문 3편을 실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동행했는가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한겨울 설날 주변의 휴가를 빌미 삼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바이칼 호수 위에 섰다. 새해를 문명과 절연된 태고의 원시 속에서 맞이하고 싶고, 나남출판에 합류한 고승철 주필과 속내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나이 들어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히려는 소박한 생각으로 수요일 저녁마다 공부했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사람들과 함께한 역사공부의 연장으로 떠난 터키와 스페인 여행에 동참했다. 서양문명 일변도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반쪽이 된 세계문명에 대한 나의 시각을 어느 정도나마 교정했는지는 모른다. 터키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아닌 ‘이스탄불의 회복’이라는 나 나름으로 역사 바로세우기를 했다. 스페인 남부의 알함브라 궁전은 감미로운 기타의 선율로만 기억했던 나의 무지를 송두리째 뒤집고,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푸른 숲을 갈구하며 지중해를 건너야 했던 이슬람의 유럽지배를 웅변하는 금자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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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황옥순


 

일상에 허우적대면서도 가끔씩 찾아오는 망중한忙中閑의 단상들을 일부러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 망각 속에 묻히기 마련이다. 부지런을 떨어 메모해 놓은 단편적인 생각도 나중에 읽다 보면 ‘내가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구나’라고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다가도, 그때 생각의 앞뒤가 연결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다 마는 경험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칼럼 집필을 청탁받고, 숙제하는 학생처럼 긴장하는 데드라인을 넘나들었기에 이 책의 원고가 될 수 있었다. 논객으로 초대받았으니 현안인 정치문제에 대한 글을 써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문화의 향기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오래가야 한다는 출판장이의 작은 고집을 존중하고 나의 유쾌한 배반을 받아준 덕에 이만한 원고가 모인 것이다. 

 

〈한국일보〉 이계성 논설실장의 권유로 작년부터 집필한 ‘삶과 문화’ 칼럼을 중심으로 한 에세이는 내년에 〈숲에 산다〉라는 이름으로 나남출판 40년과 나남수목원 10년을 기리고 개인적으로는 고희를 기념하여 출판할 것 같다. 

 

책 만드는 일이 일상이겠지만, 발행인의 책이라고 각별한 애정으로 이 책을 갈무리해 준 출판사 식구들에게 새삼스럽게 감사한다.


 

2015년 5월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 꽃그늘에서 서문을 쓰고,

 2015년 9월에 제 2판, 2018년 6월에 제 3판 서문을 덧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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