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시대’ 진리의 미로 비추는 손전등
매체명 : 한겨레신문   게재일 : 2008-04-05   조회수 : 7371
〈숲길〉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신상희 옮김/나남·3만2000원

하이데거 유명 논문 한데 묶어
삭막한 기술문명 근원적 비판
예술과 언어 통한 존재의 사유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1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작을 남긴 다작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출세작 <존재와 시간>을 포함해 다섯 종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나머지 네 종이 <철학에의 기여> <이정표> <강연과 논문> <숲길>인데, 이들은 모두 후기 저작에 속한다. 이 저작들 중 <이정표>가 2005년에 국내에 번역돼 나왔으며, 두어 달 전 <강연과 논문>(이기상 외 옮김, 이학사 펴냄)이 출간됐고, 이어 최근에 <숲길>이 완역돼 나왔다. 이로써 하이데거 철학의 진면목을 담은 걸작들이 거의 다 우리말로 나온 셈이 됐다.

하이데거 전문가 신상희 건국대 교수의 10년 노고 끝에 우리말로 전모를 드러낸 <숲길>은 하이데거 후기 사유의 정수가 담긴 책이자, 수많은 논란과 해석과 영감을 낳은 논문들을 품은 책이다. 예술작품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출한 ‘예술작품의 근원’, 신의 죽음이라는 니체의 명제에 깃든 ‘니힐리즘’을 해부한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 ‘궁핍한 시대의 시인’의 의미를 독일 시인 횔덜린의 경우를 통해 밝히는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와 같은 유명한 논문들이 이 책에 포함돼 있다. 각각의 논문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이들은 한데 엮여 20세기라는 기술문명시대를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하이데거주의의 본질을 밝혀 보여준다.

<숲길>의 원제는 ‘홀츠베게’(Holzwege)라는 옛 독일어 단어다. 이 단어를 책 제목으로 삼은 이유를 하이데거는 책머리에 시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수풀(Holz)은 숲(Walt)을 지칭하던 옛 이름이다. 숲에는 대개 풀이 무성히 자라나 더는 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들이 있다. 그런 길들을 숲길(Holzwege)이라고 부른다. 길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같은 숲 속에 있다. (…) 나무꾼과 산지기는 그 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숲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숲이 ‘존재의 진리’를 의미한다면, 숲길은 그 진리를 찾아가는 사유의 미로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길을 알 알고 있는 나무꾼 또는 산지기는 하이데거 자신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진리의 숲을 알고 지킨다는 자부가 담긴 글인 셈이다.

책의 맨 앞에 실린 ‘예술작품의 근원’은 그 존재의 진리에 이르는 산지기의 진지한 사유노동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사물’과 ‘도구’를 거론한다. 돌이나 나무 같은 사물은 자족성과 자생성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반면에 도끼나 신발 같은 도구는 용도성과 제작성을 본질적 특징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용도를 위해 누군가가 제작한 것이 도구라는 말이다. 작품은 누군가 제작했다는 점에서는 도구와 유사하지만, 스스로 충만하다는 점에서는 사물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예술 작품의 본질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구두>를 예로 들어 예술 작품의 근원으로 들어간다. 그는 시적 상상력으로 그림 속 낡은 구두와 구두의 주인인 아낙과 구두를 둘러싼 세계를 묘사한다.

“너무 오래 신어서 가죽이 늘어나 버린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밭일을 나선 고단한 발걸음이 엿보인다. (…) 이 도구에서는 빵을 확보하기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고난을 이겨낸 후에 오는 말없는 기쁨과, 출산이 임박해서 겪어야 했던 (산모의) 아픔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리는 전율이 느껴진다. 이 도구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농촌 아낙네의 세계 속에 포근히 감싸인 채 존재한다.”

고흐의 그림은 이렇게 구두라는 도구의 진리를 알게 해준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예술 작품은 낡은 구두가 진실로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준다. “예술 작품 속에서 존재자(존재하는 것)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다.” 그렇게 예술 작품은 진리를 밝히고 세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술 작품을 통해서 진리가 존재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예로 들어 그런 사태를 설명한다. 신전이 대지 위에 건립됨으로써 그 신전의 세계 안에 신들이 비로소 거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전이 신들의 세계를 마련하듯이, 예술작품은 진리를 세워 드러나게 한다. “예술이란 진리가 생성되며 일어나는 하나의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본질상 ‘시짓기’(Dichtung)’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왜냐하면 지어냄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시짓기이기 때문이다. 건축이든 회화든 음악이든 그것이 진리를 세우고 밝히는 일이라면 결국엔 일종의 시짓기가 된다. 예술은 시짓기다. 그런 시짓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언어는 존재의 진리를 들이고 보존하는 ‘존재의 집’이 된다. 하이데거는 다른 논문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에서 모든 존재자를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근대 기술문명의 지배를 ‘세계의 밤’, ‘궁핍한 시대’라고 지칭하면서, 그런 밤의 시대에 시인은 “온전한 것” 곧 진리를 노래함으로써 이 시대의 물음에 답한다고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이전글 독립투사이자 교육가였던 현상윤 선생...모교 초대총장 지낸 대한민국 1호 박사
다음글 ‘소명있는 직업정치인’ 보고싶다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