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3.12.18>-김우창 교수 “정치를 믿고,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체념의 조형')
작성일 : 2013-12-18   조회수 : 2220
김우창 교수 “정치를 믿고,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

기사입력 2013-12-18 03:00:00 기사수정 2013-12-18 03:00:00



이 시대의 지성 김우창 교수가 ‘체념의 조형’ 출판기념회서 한국사회에 던진 한마디

희수를 맞아 문학선을 펴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오른쪽)는 “제가 젊었을 때 소설가 김광주 선생(소설가 김훈의 부친)이 ‘동네 양복점에서 주문받아 양복을 짓듯이 글을 주문생산 하느라고 본격적인 작품을 못 썼다’며 한탄하셨다. 그 말씀이 제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왼쪽은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가운데는 유종호 문학평론가.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삶이란 죽음의 바다에 이르는 하나의 파동에 불과하다고 말했어요. 영원한 것은 죽음이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잠깐 잘못되어 일어난 파동이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사람이 목숨을 받아 산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일이고, 좀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지성으로 꼽히는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가 17일 희수(喜壽·우리 나이로 77세)를 맞았다. 마침 그가 지난 50년간 쓴 문학 관련 글 가운데 34편을 엄선해 엮은 신간 ‘체념의 조형’(나남)이 출간된 날이기도 했다.

이날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출판기념 집담회에는 유종호 문학평론가(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진덕규 이화여대 석좌교수,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최광식 고려대 교수(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최맹호 동아일보 부사장 등 학계와 문화계, 언론계 인사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의 질문에 문학계의 거목은 시종일관 맑은 표정과 겸손한 말투로 답을 이어갔다.

책 제목 ‘체념의 조형’은 릴케의 시구 “나무는 스스로에 금을 긋지 않으니. 그대의 체념의 조형(造形)에서 비로소 사실에 있는 나무가 되리니”에서 따왔다. 김 교수는 “릴케의 시에는 나무를 볼 때 모든 주관적 생각을 체념하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며 “체념은 사람이 마음속에 가진 것을 버리는 것이고 조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 인식의 기초이자 인생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요즘 시인들이 주관적이고 기발한 것을 시에 많이 넣는데 그렇게 되면 시가 사회의 문화사적 정신적 역할을 할 수 없다”며 “자기를 버려야 시인이 된다”고 일침했다.

청년 시절 그는 폭넓게 세상을 공부하려는 생각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문학과 철학을 좋아해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에도 그의 사유와 글쓰기는 영문학에 한정되지 않고 정치 역사 예술 철학 전반을 아우르며 폭넓은 통찰을 제시해왔다. 그런 김 교수가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요순시대에 ‘정치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 정치가 필요하다’는 모순적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정치를 믿을 수 있는 삶, 정치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김 교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두루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이 요새 수신(修身)도 안 하고 평천하(平天下)도 안 하고 그저 눈에 띄는 기발한 이야기만 하려고 해요. 난 원래 이데올로기적 문학에 반감이 있었지만 요새는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문학 하는 사람, 특히 시인은 국민의 교사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글을 써야 합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새겨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우리나라처럼 정신적으로 깨진 나라를 찾기 어려워요. 서양은 200∼300년 전부터 근대정신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이뤄냈지만 한국은 그런 전통이 없는 가운데 급속히 근대화를 했습니다. 외향적으로는 서양과 비슷해졌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현재적 관점에서 새겨야 할 우리 전통이 많아요.”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토마스 만은 소설 ‘마의 산’ 서문에서 자신이 하는 얘기가 길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데, 철두철미한 것만이 우리에게 진정 흥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면서 “그처럼 철저함에 투철한 것이 김 교수의 사유와 글의 특징이며, 이는 우리 문학풍토에서는 유일무이하다”고 상찬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http://news.donga.com/3/all/20131218/596158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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