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3.12.18>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 외치는 사람, 修身(수신)도 제대로 못해"('체념의 조형')
작성일 : 2013-12-18   조회수 : 2223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 외치는 사람, 修身(수신)도 제대로 못해"

어수웅 기자
입력 : 2013.12.18 03:05


喜壽(희수)맞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이 자리에 모시는 데 딱 77년 걸렸습니다."

엄숙한 분위기가 순간 풀어졌다.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김우창(77) 고려대 명예교수의 책 체험의 조형-전체성의 모험(나남) 출판기념 집담회(集談會)가 열렸다. 학술 모임 같은 이름이지만, 여러 의미가 있는 자리. 집에서 쇠는 실제 생일은 따로 있다지만, 호적상 77세 희수(喜壽)를 맞은 날인 동시에 생애 첫 기자 간담회 자리이기도 했다. 40여년 전 첫 책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을 펴낸 이래, 그는 한국 인문학의 한 정점으로 꼽혀 왔다. 하지만 2005년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주빈국(한국) 조직위원장으로서의 기자회견을 제외하면 이런 자리는 처음. 이유를 묻자 "유명인사도 아닌데 무슨…"이라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여담이라며 유명 인사의 정의를 덧붙였다. 유명 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기 집에서건, 동창회에서건, 문학계에서건,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이미 유명 인사라는 것이다. 그동안 간담회를 사양한 것에 대한 우회적 겸양이었다.



김우창 교수의 출판기념과 77세 희수 축하 시루떡 촛불을 네 명의 원로 학자가 함께 끄고 있다. 왼쪽부터 엄정식 유종호 김우창 진덕규 교수. /이덕훈 기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영문학과로 옮겨 졸업했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로 돌아와 평생 고려대·이화여대에서 가르쳤다. 흐르는 물 같은 예술가의 문체를 지닌 투철한 이성주의자로 꼽히는데, 방점은 투철에 있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유종호 예술원 회장이 축하를 겸해 일화를 들려줬다. 1990년대 초반 일본 체류 당시 우리나라가 그들보다 나은 장점을 열심히 찾아봤다는 것. 독서량이나 청결 의식 등 모든 것이 뒤지는데, 단 두 가지. 연호(年號·당시 쇼와)를 쓰는 그들과 달리 우리는 서기(西紀)를 쓴다는 점, 또 하나는 일본 신문의 시시한 필자들을 보고 있자니 김우창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그는 "한 문제를 철저하고 투철하게 다루는 글과 사유의 태도, 우리 문학 풍토에서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했다.

평소 여러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저술로 이름났지만, 이날의 김 교수는 명료하고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자신의 사유를 요약했다. 정치학 그만두고 영문학으로 옮긴 청년 김우창의 선택부터 그랬지만, 그의 소신은 "정치 가까이 할 일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는 것. 요순시절 농부들이 격양가(擊壤歌) 부르듯, 정치를 잊을 수 있어야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날 북한의 장성택 처형 사건을 여러 번 언급했다. 그는 "마음이 아주 심란했다"면서 "어떤 이념적 정당성을 대더라도 최근 북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사람이 이렇게 죽어도 되나, 이건 곤란하지 않나"라고 했다.

그는 "정치에의 관심도 중요하겠지만, 정치가 인생을 대체할 수는 없다"면서 "수신(修身), 제가(齊家) 후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모르지만, 치국평천하를 먼저 부르짖는 사람들이 수신 제대로 하는 것은 못 봤다"고 했다.

77세. 그는 토머스 하디의 시를 인용하면서, 나이듦에 대해 말했다. "나이를 먹어야 세상을 깨닫는데, 깨닫고 나면 그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나이가 된다"는 것. 김 교수는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허무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니만큼 좀 더 너그럽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 나이에 깨닫는다"고 했다.

이날 제자인 57세의 고려대 이남호 교수가 화동(花童) 역할을 자처하며 보자기에 싼 책을 봉정했다. 희수 축하 시루떡은 70대 이상인 유종호 예술원 회장,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함께 잘랐다. 김인환, 최광식, 염재호, 김형찬 고려대 교수, 소설가 김용희, 시인 이영광, 서울대 오생근 명예교수 등 50여 후학들이 이 생일잔치, 첫 기자간담회를 축하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18/20131218001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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