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항신문 2013.12.18> 김우창 교수 “정치를 가까이할 필요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체념의 조형' )
작성일 : 2013-12-18   조회수 : 2141
김우창 교수 “정치를 가까이할 필요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ㆍ50년 문필작업 결산 ‘체념의 조형’ 발간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77)는 영문학 전공자이면서 문학평론가이다. 그러나 문학평론이란 말에 갇히지 않는 폭넓은 이론과 사상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를 해왔다. 1965년 ‘청맥’에 실은 ‘엘리어트의 예’로 문필 작업을 시작한 이래 그가 보여준 지적 성취는 지식인 사회 전반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현자”라고 했다. 이처럼 학문적 경계를 넘어 지적인 업적을 승인받는 것은 김 교수가 주로 활동한 1970~1990년대에 문학이 지적 담론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드문 일이다.

김 교수의 50여년간 문필 작업을 결산하는 책이 나왔다. 문광훈 충북대 교수가 김 교수의 글 가운데 정수에 해당하는 것을 뽑아 묶은 선집 <체념의 조형>(나남)이다. 그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 때문에 동네 양복점처럼 주문 생산을 했을 뿐 좋은 글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며 “정치를 가까이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취재기자들만이 아니라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석좌교수, 염재호 고려대 부총장 등 학계·언론계·출판계 인사 30여명이 참석했다.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 형이상학에 관심 가져야
‘심미적 이성’이란 단어는 80년대를 자위하며 쓴 말

-영문학을 전공한 문학자이면서 동양의 정신주의나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초월해 근원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이 저절로 생긴다. 한국처럼 정신적 전통이 깨어진 상황에서 근대화를 이룬 사회에서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로 통합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인데 이데올로기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만 이데올로기는 동시에 사람의 생각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

-‘정치를 가까이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치를 모른 척하며 살기는 어렵다. 문학 또는 인문학은 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요순 시대의 이상이 말해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정치란 정치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문학은 개인의 체험·고통·행복에 대해 말한다. 개인의 체험과 느낌에 입각해 우리 정치가 제대로 돼가고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정치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질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건 정치로 인생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수신’을 통해 ‘평천하’에 이르는 것이 동양의 이상이라고 할 때 문학은 ‘수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삶이라는 구체적 바탕 위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길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나는 이데올로기적인 문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왔지만 요즘처럼 기발한 이야기, 눈에 띄는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는 문학이 많이 나오는 시절에는 차라리 이데올로기적인 문학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체념의 조형’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 ‘나무는 스스로에/ 금을 긋지 않으니. 그대의 체념의 조형에서/ 비로소 사실에 있는 나무가 되리니’라는 릴케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사람이 어떤 사물을 인지한다는 것은 주관적인 인지능력을 통한다는 점에서 사물 자체를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조차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식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념’이라고 말한 것이다. 요즘 시에는 주관적인 것이 너무 많다. 자기를 버려야 진짜 시인이 될 수 있다.”

-올해로 희수(77세)를 맞았다. 나이듦에 대한 생각은.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시 한번 릴케를 인용하자면, 릴케는 삶과 죽음 중 죽음이 진짜이고 삶이란 죽음의 바다 위에 일어나는 작은 파동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주 깊은 의미를 담은 이야기다.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우창 사상 세계를 규정하는 열쇳말 중 하나가 ‘심미적 이성’이다. 책에는 “유동적 현실에 밀착하여 그것을 이성의 질서 속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원리”라고 나오는데 어떤 뜻인가.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이다. 구체적인 뜻을 풀어 밝히는 대신 그 말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다음 사람들은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출현했다. 비유란 그 비유의 원천이 되는 사실을 변형하는 것인데 사실 자체와 비유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면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꽃다운 청춘’은 말이 되지만 ‘돌 같은 청춘’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1980년 당시 우리 사회에 민주적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것은 아닌가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생각했던 말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172053005&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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