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3.06.14>5년7개월 아내간병일기 낸 원로 언론인
작성일 : 2013-06-19   조회수 : 2539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5년7개월 아내 간병일기 낸 원로 언론인

ㆍ강한필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암 환자에 경험·정보 공개

‘그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9개월. 몽유병 환자처럼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던 가련한 영혼이 이제 겨우 이 작은 책상 앞에 이르렀습니다.’(서문)

5년7개월, 2036일간 난소암으로 투병한 아내 곁을 지켰던 원로 언론인 강한필씨(78·사진)가 간병일기를 간추려 <사랑>(나남)이란 책을 냈다. 2009년 8월6일 세상을 떠난 아내 정복숙씨(당시 66세)의 병이 발견되기 이틀 전인 2004년 1월10일 시작된 일기는 삼우제를 지낸 2009년 8월10일 끝을 맺는다. 투병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때로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고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며 사랑을 확인했던 소중한 순간들이다.

“병실 구석에서, 휴게실에서, 서재에서 썼던 일기입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남기려고 했는데 암 환자나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해서 책으로 냈습니다. 마누라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아마 어려운 일을 했다고 칭찬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향신문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사회부장, 외신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지냈고 불교방송 전무와 사장 등으로 30년간 언론계에 몸 담았다. 바쁜 기자생활로 길게는 하루 20시간씩 밖에 머물면서 집안일과 아이들 양육은 아내가 알아서 하려니 맡겨놓고 산 세월이 결혼생활 40년 중 30년이었다. 사회생활을 마감하고 아내와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 무렵, 아내가 덜컥 암에 걸렸다. 그때부터 모든 일을 접고 간병에 매달렸다.

“미안했습니다. 집에 있어보니 집안일이 보통 많고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이걸 다 아내에게 맡겨놓았으니 그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린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담담하면서도 정성스레 써내려간 간병일기는 아내에 대한 연민과 사랑, 쾌유를 비는 간절한 기도, 반복된 수술과 항암치료 과정의 기록으로 빼곡하다. 아내와 엄마를 살리고자 했던 남편과 2남2녀 자식들의 노력과 염원은 점점 무게를 더하면서 어느 순간 독자의 눈물을 쏙 빼놓는다. 선하고 성실하며 자상한 아내이자 엄마였던 고인의 생애가 남편의 일기 속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나면서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든다.

아내 정씨의 투병은 시종 가시밭길이었다. 발견 당시 난소암 3기로 암 덩어리가 10㎝나 됐으며, 여러 군데 전이돼 5번의 큰 수술과 50번의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이 빠졌다 나기를 6번 반복했다. 사흘에 한 번꼴로 병원을 드나들고 100번에 가까운 입원과 퇴원을 감내했다. 그 사이 잠깐씩 병세가 좋아지면 희망과 행복의 날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부부는 함께 산책하고 여행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하루라도 가족 곁에 머물고자 한 아내는 야무지게 자신을 다잡고, 기력이 닿는 대로 집안일에 정성을 다했다. 장녀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가 되고, 막내아들이 가정을 꾸리는 경사도 지켜봤다.

“암 수치가 많이 올라가 있다는 주치의의 설명이다.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이다. 좋아지고 있다는 진단에 희망에 부풀어 새해를 맞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암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검사결과를 순식간에 뒤집고 의사도 속이고 모두를 속인다.”(2005년 1월11일)

“41번째 결혼기념일. 만감이 가슴에 회오리친다. 벌써 1주일째 변 한번 못 보고, 3일째 물 한 모금 못마시고, 각종 주사줄을 줄줄이 달고, 코에는 호스를 끼우고, 그의 일생에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비를 맞고 있다. 아내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행복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2009년 4월21일)

강렬한 생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의 오열 속에서 조용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강씨는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유언 비슷한 걸 하려고 하면 마음이 약해질까봐 자꾸 막았던 게 후회된다. 그런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의 병을 지켜보면서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병중의 마누라가 제일 원했던 건 시원한 물을 벌꺽벌꺽 마시는 것, 소변·대변 제대로 시원하게 보는 것, 더울 때 찬물 한 바가지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일상이 행복이라는 것, 오늘 하루가 죽은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살고 싶었던 하루라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아내와 사별한 지 3년 만인 지난해 가을부터 원고지 7000장 분량의 일기장을 3분의 1로 정리한 그는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도 많은 부분이 잊혀졌다는 게 슬펐다”고 말했다. 평생 언론인으로 살아온 저자는 암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사건사고를 추적하듯이 병을 탐색하고 치료법과 의료제도, 의학적 문제점을 평가한다. 단순히 암 환자 유족의 넋두리가 아니라 암이라는 치명적 질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정보를 나누고자 했다.

<글 한윤정·사진 박민규 기자 yjhan@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art_print.html?artid=201306132156295
이전글 <세계일보 2013.12.12> [학술 단신] - ‘세계 각국 역사논쟁’ 국제학술회의 외('영혼에 관한 토론문제' 소개 수록)
다음글 <경향신문 2013-11-22>'문화, 책'- 새책(모권1,2)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