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3.04.29>시인 김영승, 5년 만에 新作 "흐린 날 미사일"
작성일 : 2013-04-29   조회수 : 3191
"詩는… 돌 한줌을 하늘에 확 뿌려 만든 별자리"

15년 전 인천에서 터진 미사일, 그에게는 깃털달린 항해사로
12년째 禁酒 아름다운 폐인 반성과 권태의 비애를 넘어 삶을 성찰하는 서정을 짓다


바깥

바깥은 너무 추워서 뺨을 마른 오징어 찢듯 찢는 것 같고
물오징어 가위로 쭉쭉 썰듯 써는 것 같은데

집에 들어오니 따뜻하다

바깥은 네온사인에
마천루의 불빛에
해파리 같은데

-김영승


고개 숙인 넥타이에 다소곳한 정장. 뜨악한 표정을 지었을 때, 시인의 첫마디는 변장이었다. 봉두난발에 노숙자 같은 평소 차림 그대로 신문에 등장하면, 이웃이 당황할 거라고 했다. 아니, 이웃이 못 알아보게 하려 한다고 했다. 시인은 함부로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는 존재라면서.

인천의 괴짜 시인 김영승(55)이 5년 만에 신작 시집 흐린 날 미사일(나남)을 냈다. 아름다운 폐인 찬란한 극빈을 자처하는 그의 9번째 시집이다. 시인 하면 술과 가난이 떠오르게 마련이지만, 김영승의 경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1년 365일을 넘어 999일 술을 마신다고 해서 별명이 은하철도 999였고, 골목도 지붕도 방도 문짝도 삐뚤빼뚤한 동네의 집에 산다고 호(號)가 다왜당(多歪堂)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좌절과 비애가 아니라 힘과 에너지. 12년 전 그의 시집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집은 따뜻하다. 아니, 따뜻해서 집이다. 괴물 같은 세상에 맞서는 가족의 온기.‘ 반성’과‘권태’연작 시편을 넘어, 인천의 괴짜 시인 김영승은 아늑한 서정(抒情)을 짓는다. /이명원 기자 이번 표제작은 15년 전 그의 고향에서 있었던 사고가 씨앗이 됐다. 1998년 12월 4일 인천 봉재산의 공군방공포대에서 미사일 1발이 잘못 발사됐고, 3초 만에 지상 300m에서 자폭장치에 의해 폭발했다. 1초만 먼저 터졌어도, 자신이 살고 있던 봉재산 인근 아파트 전체가 날아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아찔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자세와 성찰로 사유를 확장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群落地(군락지)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및 老人(노인)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慶會樓(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雙(쌍)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垂直(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虛空(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急(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흐린 날 미사일 부분)

한때 그는 각각 1000편 넘게 연작으로 썼던 반성과 권태의 시인이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특정 개념에 갇히지 않고, 거리낌 없이 무장무애(無障無�u)의 서정으로 뻗어나간다. "시인의 정신은 고공(高空)에 있어야 한다"고 한 옥타비오 파스와, 알바트로스를 읊었던 보들레르를 인용하기도 했다. 수직으로 꼿꼿한 등꽃과 하늘로 날아간 미사일에서, 역설적으로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의 위축되고 못난 삶을 환기하고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시인은 올해로 금주(禁酒) 12년차. 뇌신경을 다쳤던 사고 이후, 의사의 권유에 따라 술보다 목숨을 선택한 게 그때다. "알코올이라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사라지면서, 머릿속의 어떤 단원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연주하고, 또 어떤 단원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연주하더라"는 후유증과 분열의 시절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시집을 펴내며 다 극복했다고 믿는다.

지난 2008년 현대시 100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각 연재했던 100대·50대 시편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올렸던 인천의 천재 시인. 이 아름다운 폐인의 한 줄 시론(詩論)은 이렇다. "시는, 돌을, 한 줌, 집어, 허공중에, 확, 뿌려서, 만든, 별자리 같다는, 생각."

어수웅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8/2013042801529.html
첨부파일 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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