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2.11.01> 배명복 칼럼 '루소의 고백'
작성일 : 2012-11-01   조회수 : 2903
[배명복 칼럼] 루소의 고백

올해는 장 자크 루소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불문학자인 이용철 교수(방통대)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루소의 『고백록』을 완역(完譯)했다. 루소가 내 나이가 되던 1765년에 쓰기 시작해 5년에 걸쳐 완성한 1000쪽 분량의 고해성사가 상·하 두 권으로 엮여 나왔다. 거울에 비친 나의 벌거벗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고백록』을 읽고 있다.

 제네바에서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근대 시민혁명을 촉발한 계몽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가 쓴『사회계약론』은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그러나 『고백록』에 투영된 루소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영혼의 소유자다. 선의와 악의가 공존하고, 고매함과 미천함이 뒤섞인 모순투성이의 인간이다.

 젊은 시절 루소는 구석진 곳을 찾아가 여자들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자기 신체의 특정 부위를 노출하기도 했다. 그는 “얌전한 처녀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했고, 어떤 처녀들은 웃기 시작했다. 또 다른 어떤 처녀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떠들썩하게 수선을 떨기도 했다”고 반응을 적었다. 위대한 사상가 루소가 ‘원조 바바리맨’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루소는 자식들을 모두 자기 손으로 고아원에 보냈다. 그래 놓고 자녀 교육용 지침서로 『에밀』을 썼다. 단어 하나로 규정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이 인간이다.

 나는 루소가 『고백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유일무이성(有一無二性)’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연은 나를 주조(鑄造)했던 거푸집을 깨뜨려버렸다”고 선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이 세상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단 하나의 잣대로 매도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왕권신수설에 도전한 반역자’ ‘원죄설을 부정한 이단자’로 몰려 탄압과 박해에 시달렸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써 붙인 주홍글씨 하나로 나를 재단하지 말고, 끝까지 읽어보고 내가 진짜 어떤 인간인지 판단하라고 『고백록』을 남긴 것이다.


 얼굴에 낙인을 찍고, 가슴에 딱지를 붙여 서로를 욕하고 매도하는 우리 사회가 나는 무섭다. 빨갱이니 종북좌파니 보수꼴통이니 친일매국노니 민족반역자니 친미주의자니 반미주의자니 친재벌이니 반재벌이니 하는 낙인과 딱지가 위력을 발휘하는 세태가 두렵다. 단어 하나로 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유일무이한 인간에 대한 모욕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 폭력이다.

 말 한마디 때문에 인터넷과 SNS에서 융단폭격을 당하고, 소신 때문에 무차별적 언어 폭력과 법의 칼날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 사회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도 그렇다. 인터넷과 교실에서 왕따와 따돌림이 판을 친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몸을 사린다.

 대선 정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북방한계선(NLL) 논란이나 정수장학회 논란도 마찬가지다. 유력 대권 후보에게 ‘박정희의 딸’과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란 딱지를 붙여 깎아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정수장학회와 노무현의 NLL 발언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무덤 속 관 뚜껑을 열고 시체에 대해서까지 종북주의자니 친일독재자니 하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섬뜩한 광기가 느껴진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낙인 찍어 매도하는 것은 인간은 모두 다르다는 전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우열의 대상이나 차별의 근거일 순 없다.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다수가 소수를 탄압하고, 억압하는 일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르면 적(敵)으로 보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횡행한다.

 어느 시대나 소수는 외롭다. 그러나 통념과 관습에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기에 역사는 발전한다. 다수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이라면 지금도 태양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에서 발전과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전체주의 사회인 북한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진정한 국민대통합은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지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매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우리가 선거를 하고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싸울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선거를 하고 대통령을 뽑는 것이다. 단어 하나로 사람을 낙인 찍고 매도하는 대한민국은 우리가 바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배명복 기자 [bmbmb@joongang.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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