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2.7.25 신공화주의>개인의 자유와 공공선 충돌 피할 '중간지대' 있다
작성일 : 2012-07-30   조회수 : 3097
‘신공화주의’ 번역 출간
독립적인 개인 주목한 자유주의
전체 강조한 공화주의 뛰어넘는
사회 속 개인 자유 개념 제시한
필립 페팃, 양쪽 논쟁 새 틀 마련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불붙었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논쟁은 1990년대 들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잇따라 몰락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다. 공동체적 연대와 적극적 정치 참여, 시민적 덕성 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한 논리 구조를 지녔다는 비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공화주의 진영에서 공동체주의와는 다른 공화주의의 새로운 면모를 제기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고, 지금까지도 공화주의는 여전히 자유주의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다.


<신공화주의>
최근 번역·출간된 필립 페팃(1945~·사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신공화주의>는 ‘자유’를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해, 자유주의·공화주의 논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핵심적인 저술로 꼽힌다. 1996년에 출간된 이 책은 200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세계 정치사상계에서 공화주의 부활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책의 원제는 그냥 ‘공화주의’(Republicanism)이지만, 옮긴이인 곽준혁 숭실대 교수(가치와윤리연구소장)가 공화주의에 대한 국내의 선입견으로부터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은이의 동의를 얻어 ‘신공화주의’로 옮겼다.

자유주의와 대립했던 공화주의는 주로 공동체와 시민의 정치 참여, 시민적 덕성 등을 강조했고, 그 뿌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에 닿아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중요하게 언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며, 이런 경향을 ‘시민적 공화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페팃은 이와 달리 퀜틴 스키너, 마우리치오 비롤리 등과 함께 로마 공화국과 로마의 정치사상가 키케로로부터 공화주의의 전통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신로마 공화주의’로 구분되며, 공화주의에 자유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기에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라고도 불린다.

페팃이 <신공화주의>에서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비지배 자유’, 곧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의 자유”다. 원래 공화주의적 전통 속에서 자유는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켰는데, 16세기 이후 홉스와 벤담을 거쳐 자유주의가 형성되면서 그 개념이 “개인의 선택에 대해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불간섭 자유’로 변질됐다는 것이 페팃의 주장이다. 페팃은 주인(도미누스)과 노예(세르부스)의 비유를 통해 지배와 간섭의 차이를 설명한다. 노예는 주인의 자의적 지배를 받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설령 주인이 노예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자유롭다고 볼 순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서로 지배하고 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더라도 법률이나 정부와 같이 ‘지배하지 않는 간섭자’ 역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페팃의 이런 논의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했던 기존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 논쟁 구도에 균열을 낸다. 행위로 드러나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속에 개인이 처한 지위와 조건으로까지 자유의 개념을 확장시켜, 개인을 사회적 원자로만 파악해온 자유주의와 개인보다 전체를 강조해온 공동체주의 양쪽의 문제점들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페팃은 이런 비지배 자유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 자의적인 ‘사적 지배’(도미니움)들을 제거하기 위한 법의 지배와 헌정주의의 필요성, 또 이렇게 이뤄진 공화주의 국가가 ‘공적 지배’(임페리움)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시민사회의 ‘견제력’과 민주주의의 중요성 등을 차례로 논증해나간다.

페팃의 비지배 개념은 자유주의·공화주의 진영 양쪽에 큰 영향을 줬으며, 지난해에도 세계적 정치이론 잡지들이 페팃에 대한 특집을 싣는 등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곽준혁 교수는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페팃이 비지배 자유를 어떤 최상의 이상이 아니라, ‘민주적인 조정을 위한 원칙’으로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곧 비지배 자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포괄하는 ‘제1원칙’이 아니라 결코 피할 수 없는 다양한 갈등에 대해 시민들이 서로 책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심의’할 수 있게 만드는, ‘가능한 최선의 실현’을 위한 현실적인 정치이론이라는 평가다.

또 곽 교수는 “국내에선 공화주의라고 하면 민족주의나, 전체, 통합 등에 대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며 “이 책을 통해 공화주의의 다양한 담론이 더 많이 알려지고 연구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공화주의 담론 내부의 여러 갈래들을 명확히 파악하지 않고 그저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공화주의를 찾는다면, 우리 사회가 결코 공화주의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이란 충고다.

페팃은 지난 5월 고려대의 초청으로 방한해 ‘공화주의·민주주의·사회정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다문화 환경에서 공화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가 최근 그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주요 연구 주제라고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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