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2.08.11 고백론>명저 새로 읽기 장 자크루소 '고백론'
작성일 : 2012-08-13   조회수 : 3414
ㆍ불완전한 인간 루소 ‘현대인의 초상’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나남)을 보면 나는 무언가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는 절대로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것은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당시 일기는 늘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다. 판에 박힌 어린이의 일상생활에 매일매일 일기장을 채운다는 것은 정말이지 감당키 어려운 고역이었다. 몇 학년 때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같은 반 아이가 “오늘은 그동안 밀린 2주일치 일기를 다 썼다”고 일기에 썼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도 늘 그런 식이었는데! 아무튼 고등학교 때부터인가 일기 검사를 하지 않으니까 꼭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 해방된 기분을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만끽하고(?) 있다.

내가 루소의 저작에 대한 서평을 하면서 뜬금없이 일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것이 인간발달에 대해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 때문이다. 일기라는 것이 한마디로 거짓 고백의 훈련이었다. 예컨대 오늘은 너무 놀기만 했는데, 앞으로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어드리는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는 식으로! 그 다음 날도 비슷하다. 동생들을 잘 돌보아주는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는 식으로! “나는 일기 쓰기가 싫다, 아니 일기를 쓸 수 없다”가 가장 진솔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사실 <고백록>은 인류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의 자화상이라고 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다섯 명의 자식을 모두 고아원에 버리지를 않나, 무고한 사람을 중상모략하지 않나, 도둑질을 하지 않나, 은혜와 우정을 배신하지 않는가, 열한 살짜리 어린 아이가 여성으로부터 볼기를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질 않나? 루소 자신의 말대로,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것이 한 인간의 성장과정 및 삶과 행위에 대한 내적이고 주관적인 자아성찰이라는 사실이다. 그 인간은 유일하고 독특하기 때문에 그 누구와도 혼동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다. 루소는 <고백록>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나뿐이다. 나는 내 마음을 느끼고 인간들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보아온 누구와도 같게 생기지 않았다. 현존하는 어느 누구와도 같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고 감히 생각한다. 내가 더 낫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다르다. 자연은 나를 주조(鑄造)했던 거푸집을 깨뜨려버렸는데, 그것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이었는지는 내 글을 다 읽고 난 후가 아니라면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제1권 11~12쪽)

루소의 <고백록>은 남과 다른 나의 가장 내면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는 얼마든지 모순적이고 분열적이고 내밀한 욕망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얼마든지 비열한 짓과 악을 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서 스스로 나의 본질을 파악하고 나의 삶을 창조하며 나의 행위의 근원이 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현대인이다. 그러므로 루소의 <고백록>은 단순히 루소라는 한 특정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아주 탁월한 현대인의 초상이 되는 셈이다.

이에 반해 몇 십년 전 내가 쓰던 일기장은 언제나 자기왜곡, 자기비판, 자기부정, 자기무화의 내용으로 도배되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가정, 학교, 국가 등 아주 강력한 초자아가 눈을 부릅뜨고 자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너는 남과 달라서는 안되며 언제나 초개인적인 가치에 너 자신을 함몰시키고 바로 거기에서 너의 존재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엄혹한 감시하에 그려지는 초상은 개인과 그의 삶을 억압하는 비현대적인, 아니 반현대적인 초상이었다.

루소의 <고백록>은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이다. 특히 입시에 자아를 저당 잡힌 채 현대인이 되는 기본적인 훈련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대학 초년생들에게, 그리고 인간을 형성하는 교사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사람을 흠뻑 끌어들이는 내용과 탁월한 문학성 이외에도 번역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상세한 역주를 첨가한 번역자의 노고는 분명 이 책이 갖는 커다란 장점이다.

<김덕영 | 독일 카셀대 사강사>

http://news.khan.co.kr/kh_news/art_print.html?artid=201208102119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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