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밀] 르네상스 문을 연 페트라르카 ‘창작의 비밀’
매체명 : 한겨레   게재일 : 2023.11.03   조회수 : 42

최초의 인문주의자·시인

페트라르카의 라틴어 산문

 

구원과 욕망 사이 분열된 내면

근대 인간의 원형 담은 고백문학

 

나의 비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l 나남 l 17000

 

신곡을 쓴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가 서양 중세의 가을을 통과한 시인이라면, 한 세대 뒤에 태어난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고전 부흥의 빛을 불러낸 이탈리아 르네상스 최초의 시인이다. 페트라르카는 산문 작가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이 작가가 라틴어로 쓴 산문 작품 나의 비밀’, ‘고독한 생활’, ‘종교적 여가가 우리말로 처음 번역돼 나왔다. 페트라르카 연구자 김효신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세 편을 모두 우리말로 옮겼다. 특히 이 세 편 가운데 시인의 내적 갈등을 고백한 나의 비밀은 페트라르카 산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중부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당시 페트라르카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정치적 격변에 휘말려 단테와 함께 고향을 떠나 망명 중이었다. 어린 페트라르카는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건너가 거기서 자랐다. 아비뇽은 로마 교황청이 옮겨와 있던 새로운 종교 중심지였다. 페트라르카는 10대 때 아버지의 뜻대로 몽펠리에대학과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1326년 아버지가 죽자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문학 창작에 몰두했다. 페트라르카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사건은 1327년 스물세 살 때 아비뇽의 성 클레르 성당에서 젊은 유부녀 라우라를 만난 일이었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영원한 뮤즈였듯이, 라우라는 이루지 못할 사랑의 쓰라림으로 젊은 페트라르카의 창작혼에 불을 지른 또 다른 뮤즈였다. 그 불꽃은 1348년 라우라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페트라르카는 고전문헌학의 아버지라는 타이틀도 지녔는데, 알프스 산속 수도원 지하 서고에 묻혀 있던 고대 라틴어 문헌을 찾아내 세상에 알린 사람이 페트라르카였다. 이 문헌 발굴 작업을 통해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의 부활을 이끎으로써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의 선구자가 됐다. 이탈리아 속어로 작품을 쓴 단테와 달리, 페트라르카가 라틴어로 문학 창작을 시작한 이유도 열렬한 고전문학 사랑에 있었다. 그런 라틴어 사랑이 빚은 작품이 서사시 아프리카. 한니발을 물리친 로마 장군 스키피오를 찬양하는 그 작품으로 페트라르카는 1341년 로마 시의회가 주는 계관시인의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서사시의 문학적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고 1342년부터 이탈리아 속어로 서정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페트라르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서정시집 칸초니에레. 연인 라우라에게 바친 칸초니에레는 이후 400년 동안 유럽의 시문학을 지배할 페트라르카풍을 일으켰다.

 

이 시집을 써 나가던 때에 집필한 라틴어 산문이 나의 비밀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대화체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페트라르카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 프란체스코와 중세 기독교 체계를 세운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그리고 진리의 여신이 등장한다. 진리의 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와 프란체스코가 사흘 동안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놓고 대화한다. 페트라르카는 29살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처음 만난 뒤 되풀이해서 이 저작을 읽었다. 작품 속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내면의 갈등에 시달리는 프란체스코에게 종교적 구원의 길을 안내한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적 실존 인물 아우구스티누스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페트라르카의 상상력이 스며든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작품 속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인용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더 빈번하게 인용하는 것은 키케로나 베르길리우스 같은 로마 시대 작가들의 작품이다. 심지어 페트라르카의 서사시를 직접 따와 이야기하기도 하며, 페트라르카가 다른 작품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반복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작품 속의 아우구스티누스와 프란체스코는 각각 페트라르카 자신의 한쪽 면을 특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구원을 열망하는 페트라르카를 대변한다면, 프란체스코는 세속적 쾌락과 명성에 매달리는 페트라르카를 보여준다. 이 두 사람이 진리(진실)의 여신앞에서 치열한 대화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페트라르카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대화편 형식을 이어받되 그 형식을 태반으로 삼아 근대 고백문학을 잉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 속 아우구스티누스와 실존 인물 아우구스티누스의 불일치는 이 작품에 서술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자체에서도 발견된다. 작품의 첫 번째 대화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대목이 그런 경우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죄악에 빠뜨리는 것도 자유의지이지만, 인간을 그 죄악에서 끌어내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도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실제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에 죄를 범하고 악에 빠진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서 인간이 곧장 선을 이루고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론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가 신의 은총과 함께할 때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신의 은총과는 무관하게 자유의지만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고대 스토아학파 철학이었다. 작품 속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스토아철학자에 가깝다.

 

이렇게 신의 은총을 슬며시 제쳐놓는다는 점에서 페트라르카의 나의 비밀은 중세의 신중심주의에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로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 곧 인간주의가 페트라르카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프란체스코가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의 올바른 길을 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 구원을 소망하면서도 세속의 기쁨과 영광을 포기하지 않는 이 분열된 내면이야말로 근대적 인격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 내적 모순이 페트라르카의 창작에 동력이 됐을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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