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신예작가의 대하소설 『목숨』… 북콘서트에서 큰 호응
매체명 : 법률신문   게재일 : 2023.06.03   조회수 : 62

신간 출간을 자축하며 홍보하는 출판기념회 방식이 사뭇 달라지고 있다. 저자의 일방적인 강연에서 벗어나 저자와 진행자 사이에 대화를 주고받는 북토크 형식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짧은 음악공연까지 곁들인 북콘서트도 새로운 양상이다.

필자는 출판업에 10년 가까이 종사하면서 여러 출판기념회에 관여했고 지인 저자들의 행사에 부지기수로 참석했다. 과거엔 대체로 저자 관련인들의 축사에 이어 저자가 집필 경과 및 소회를 밝히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힘깨나 쓰는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책값이 든 봉투를 내미는 하객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룬다.

 

올 봄에 홍익대 부근에서 열린 어느 북콘서트에 갔더니 무명의 저자를 띄워주기 위해서인지 몇몇 유명 정치인들이 나타나 진행을 돕고 축사도 했다. 가수가 노래를 몇 곡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축제를 방불케 했다. 행사가 끝나자 저자의 사인을 받으려는 독자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지난 511일 창원시 3·15아트센터에서 열린 대하소설 목숨의 북콘서트에 참석했다. 저자는 이 지역 출신인 하기주(84) 작가, 80대에 데뷔한 신예소설가이다. 코오롱 대표이사를 지낸 전문경영인이었는데 직장에서 은퇴한 직후 한동안 칩거하며 대작을 완성했다 한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무렵의 마산이 주요 무대인데 강()씨 가문과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다루었다. 당시 마산은 일본인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일본인이 많은 지역이었다.

 

이 소설은 관혼상제와 당대 세시풍속을 정밀하게 묘사해 정통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수많은 관련 용어를 구사해 언어의 보고(寶庫) 역할을 한다. 또 여러 등장인물들이 마산지역 토속 사투리로 대화하기에 생동감을 준다.

 

작가는 고교생 시절에 잡지 <학원>의 공모전에서 시() 장원을 차지하는 등 문재를 드러냈으나 소년가장으로서의 책무 때문에 오랫동안 문학과는 먼 삶을 살았고 노년에 꿈을 이루었다. 작품 출간 경위도 드라마 같다. 완성한 원고를 친구인 문학평론가 김치수 교수에게 보였더니 걸작이긴 한데 신인 작가의 대하소설을 내줄 출판사를 찾기가 어려울 테니 우선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하라고 조언했다. 유장한 문체로 웅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를 원고지 5,000매에 담은 작가에게 신춘문예용 70~80매 단편소설은 다른 영역이었다.

 

몇몇 지인에게 원고 파일을 보냈고 세월이 20여 년 흘렀다. 작가는 원고 파일도 잃어버리고 출력한 종이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김운하 시인이 보관하고 있던 이 원고 파일이 입수되었다. 되찾은 원고가 창원의 문화운동 시민단체인 합포문화동인회(이사장 강재현)에 전해졌다. 지역에서 법조인으로 명망이 높은 강재현 변호사는 원고를 읽고 감동하여 회원들에게 출판을 후원하자고 제의해 큰 호응을 얻었다. 출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3월 초에 책이 나왔다.

 

목숨북콘서트는 저자와 고은주 소설가의 북토크로 시작되었다. 이어 소설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낭독음악극으로 꾸민 공연이 열렸는데 나유신 변호사 등 아마추어 성우들의 열연에 관객들은 우레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저자와 독자와의 대화 시간에는 집필 경위를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작가는 멸치잡이 장면을 묘사하려 뱃사람 친구에게 꼬치꼬치 물었고 수산청 자료 등을 꼼꼼히 살폈다고 답변했다.

 

법학자로서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하태영 동아대 로스쿨 교수는 북콘서트에 참석하고 목숨, 관부연락선(이병주 작), 파친코(이민진 작) 3개 작품을 묶어 읽으면 일제강점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 말했다.

 

박경리 이야기를 쓴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는 목숨은 가히 토지가 연상되는 대작이라 평가하면서 장장 26년에 걸쳐 5부로 1994년에 완결된 토지가 크게 팔리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즈음 부산방면에서부터였다라 밝혔다. 김 교수는 신문물인 혁신이 전파되는 경로는 수위도시대도시중소도시 순으로 나아가는 ‘(도시)계층확산이 통례인데 토지()계층확산의 경우라면서 목숨도 이런 경로를 밟기를 기대했다. 지역에서 성공을 거둔 북콘서트 행사의 뜨거운 열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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