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회고: 호암자전] ‘재벌집 막내아들’이 재계에 던지는 메시지
매체명 : 주간조선   게재일 : 2023.01.05   조회수 : 92

2022년 말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과연 2023년 재계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까.

 

재벌집 막내아들은 크리스마스날 최종회(16) 시청률이 26.9%를 기록하며 명성을 재확인했다. 다만 진양철 순양그룹 회장이 살아 있는 13회까지는 보는 맛이 대단했던 반면, 마지막 16회는 꽤 혼란스러웠다. 1회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윤현우 순양그룹 미래재산관리팀장이 실은 혼수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 1주일 만에 퇴원했으며, 1주일 기간에 재벌집 막내아들인 진도준의 17년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후 진도준은 덤프트럭 때문에 죽고 다시 윤현우로 회귀하여 복수를 마무리한다. 진도준으로서 삶은 꿈인지 환생인지 애매하게 처리돼 시청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적지 않다. 최종회를 보고 나니 그 이전의 모든 스토리를 거꾸로 납득하고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원작대로 진도준이 계속 살아 복수를 완성했다면 어땠을까.

 

재벌집 막내아들은 우리나라 재벌의 전형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주려고 애썼다. 순양그룹 오너 일가는 정경 유착, 비자금 조성, 불법 증여, 편법 승계도 모자라 과거 현대그룹 왕자의 난을 연상시키며 서로 배신하고 증오하다가 급기야 살인까지 교사(敎唆)한다. 돈이 많아도 더 많은 돈과 재산과 지분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을 보여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는 사도 바울의 경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다만 돈을 사랑함이 문제가 되지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누가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작가나 방송국 측이 순양 일가의 추태를 보여줌으로써 강력한 재벌개혁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등장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 다른 이슈를 덮어서인지, 아니면 재벌의 축재(蓄財) 방식을 주인공이 복수에 그대로 답습하는 스토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뚜렷하게 부각되는 메시지는 없었다. 다만 매 회 등장하는 대사들은 단순한 대본이 아니라 2023년 한국 기업에 주는 메시지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간결하고 뚜렷했다.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이번 재벌집 막내아들의 대박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송중기의 외모와 연기가 바탕이 되었다. 송혜교와 이혼한 뒤 빈센조등의 작품을 거치면서 송중기의 연기는 한결 성숙해졌다. 환타지 요소도 매력 요인이었다. 누구나 나도 재벌가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면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면 202312월 마지막 날의 주식시세표를 1월 초에 미리 손에 넣는 꿈도 꾸어 본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드라마는 그런 백일몽(白日夢) 욕구를 살짝 충족시켜 준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비롯해 IMF 외환위기, 9·11테러, 닷컴버블, 2002년 월드컵 4, 카드 대란(大亂) 1980~2000년대 주요 사건을 전지적(全知的) 작가 시점처럼 미리 알고 있는 진도준이 되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다양한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눈길을 당겼다. 진양철 회장 역을 맡은 이성민 배우의 신들린 연기는 최고의 공신이다. 이성민 배우는 1968년생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동갑이다. 그는 이재용 회장의 할아버지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역할을 외모와 말씨부터 시작해 싱크로율 90% 이상으로 해냈고, 반도체나 자동차 사업 이야기를 통해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역할도 거뜬히 처리해냈다.

 

필자는 어릴 때 삼성그룹의 발상지인 삼성상회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동네 아이들은 돈병철, 돈병철이란 말을 자주 했다. 얼핏 들으면 무슨 조롱인가 싶지만, 당시 그리 말하는 사람들의 정서는 완전히 반대였다. 6·25 이후 가난한 나라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공장을 돌리고 사람에게 월급 주고 세금으로 기여하는 애국자라는 뉘앙스가 훨씬 강했다. 어린 마음에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병철과 진양철의 일체화

 

이병철 회장은 원래 경남 의령의 부잣집 출신이라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초창기 여러 번의 사업 실패가 있었고 일본 기업 사례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완벽함과 철저함을 추구하는 삼성식 경영 스타일을 만들었다. 한편으로 이성민 배우는 고향인 경북 봉화와 영주와 대구를 거치면서 주변의 무시와 반대, 생활고를 뚫고 연극배우로 성장했다. 이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이성민 배우의 광기 어린 눈빛은 그냥 연기가 아니라, 기어코 목표를 달성해 온 자기 삶을 투영하는 것 같았다. 이병철 회장과 이성민 배우 모두 절대로 지기 싫어하고 자기 일에 대해 프로페셔널한 집념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검은색 반뿔테 안경에다 왼쪽머리 가르마, 서예를 좋아하고 정미소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까지 이병철과 진양철의 일체화가 이성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진양철 회장은 13회에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 드라마의 사실상 주인공 역할을 했다. 손자인 진도준에게 진양철 회장은 복수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진도준은 진양철을 그리워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진양철의 돈을 대하는 철학, 사람을 쓰고 일에 몰두하는 뚝심과 카리스마에 오히려 존경심마저 갖게 된 것일까.

 

돈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진양철 회장은 압박조차도 거래로 환원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넘기 위해 재벌개혁을 외치는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진 회장은 간 크게도 재벌개혁 한다 카셨습니까? 잘 안될 겁니다. 나라를 위해선 돈 한 푼이 아까 와도 돈 한 푼을 위해선 목숨이 안 아까운 게 저희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이랑은 거래를 해야 하는 겁니다라고 소신을 밝힌다. 그러면서도 아들들을 향해서는 대통령이 칼춤을 추면 고마 팍 하고 윽 하면서 쓰러지는 척을 해야 그래야 사는 기다. 정치한다 카는 놈들 때문에 내가 우리 순양이 이번에도 얼마나 더러운 꼴을 당했는지 여기 모르는 사람 있나?”라며 기업에 대한 정치권력의 무서움을 경고하기도 한다.

 

 

돈 한 푼에 목숨 안 아까운 게 장사꾼

 

그렇게 진 회장이 던진 한마디 한마디로 경영어록집이라도 만들 분위기다. 가령 진 회장은 국내 1위라고 자기 사업을 자랑하는 아들에게 국내 1? 니 어디 전국체전 나가나?”라는 말로 질책한다. 자식들의 스케일이 못마땅해서 던진 말로, 진 회장의 배포를 보여준다.

 

그기 민주화다라는 진 회장의 언급은 정치학 교과서에 옮겨 싣고 싶은 말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첫 배경인 1987년은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면서 어느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할지 모두 고민한다. 이 상황에서 진 회장은 이항재 비서실장에게 니 민주화가 뭔지 아나? 전에는 내 주머니 돈을 노리는 놈이 군인 한 놈이었다면은, 인자는 민간인 세 놈아로 늘었다. 그기 민주화다라고 푸념한다. 유니크하고 실용적인 정의(定義). 그런가 하면 손자에게 내한테 없는 게 니한테 있어야 그게 거래다라고 가르친다. 협상론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다. “장사꾼이다 글마(그놈). 장사꾼이 이문 앞에서 부모형제, 삼강오륜 다 따지가 우예(어찌) 돈을 벌겠노라는 진 회장의 말도 인상적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고 비판할 수 있겠는데, 진 회장에게 장사꾼의 논리는 핏줄마저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 회장은 입만 열면 나에게 반기(反旗) 드는 인간들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막상 아들이나 손자가 회사 방침에 어긋나거나 심지어 경쟁사와 손을 잡더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돈을 벌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선선히 인정해 주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진 회장의 입에서도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게 코리아 스탠다드이지만, 돈을 벌 때도 정승같이 벌라 카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고백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52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 잔디광장에서 열린 2022 대한민국 중소기업인대회에서 대기업 회장들과 대·중소기업 간 공정과 상생을 통한 신동반성장을 다짐하는 핸드프린팅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돈 벌 때도 정승같이, 그게 글로벌 스탠다드

 

그러면서도 진양철 회장은 진도준에게 머슴을 키워 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고 가르친다. “정리해고 별거 아이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기다. 정도경영이라 캤나? 내한테는 돈이 정도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19974월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내뱉었던 자금이라는 것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진 회장은 기업가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잘하고 사회봉사활동 잘하고 임직원 소통도 잘하는 존재라는 요즘 정의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 성싶다. 아마 한가한 이론가로 보였을 터.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게 돈 되나. 순양에 도움 되나. 그게 안 되면 우예 기업가고.”

 

재벌집 막내아들2017년 웹소설로 연재되었고 웹툰으로 이어지면서 주목을 받아왔다. 원작을 쓴 산경(山景) 작가는 자신의 얼굴과 실명은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25년간 대기업에서 수출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을 오롯이 작품에 담은 것 같다. 드라마 극본은 김태희 작가와 신예 장은재 작가가 맡았다.

 

이 드라마에는 재계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도 자주 나온다. 원작이나 드라마의 작가가 등장인물을 빌려 하고 싶었던 말일까. 가령 진도준은 북쪽에서 김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국내 재계에서는 금기(禁忌) 표현이다. “부를 상속받은 나, 가난을 대물림한 너라는 구절에는 부자(富者)와 빈자(貧者)의 높은 벽이 느껴진다. “저 사람들한테 두 달은 고모(순양백화점 사장) 두 달과 달라요. 고모한테는 겨우 옷차림이나 바뀔 시간이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 두 달 동안 매일매일 더 끔찍한 속도로 가난해질 겁니다. 가난엔 복리 이자가 붙으니까라는 진도준의 대사는 긴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미라클인베스트먼트 오세현 대표를 통해서도 한국 재벌을 일갈한다. “뉴욕증권시장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딱지가 붙어 있으면 제값 받기 힘들다. 바로 재벌들의 경영세습 때문인 것은 아는가. 올림픽에 나갈 선수를 뽑는데 국제경쟁력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아버지가 메달리스트였는지 딱 하나만 보는 거잖아. 경영능력은 세습 따위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재벌 2~4세들은 이런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경영능력을 늘 다그쳐야 한다.

 

SK그룹 회장인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연말 기자간담회에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3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난다면 창업이라는 도전을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재벌 관련 기사의 댓글을 보니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마치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알고 있다더니라는 문구가 돋보였다. 그런 사람이 1루타부터 치고 나가 마침내 3루까지 도달한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진양철의 선구안이 아쉬운 2023

 

문제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던져 주는 메시지를 받기에 2023년 재계 전망이 암울하다는 점이다. 경제에서 자만과 절망은 모두 피해야 하지만, 새해는 위기경영 정도가 아니고 생존경영이란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적자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건설업계에는 부도 예상 기업이 거론되고 있고, 금융권에는 희망퇴직 칼바람이 불고 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경영자의 진짜 실력이 드러난다.

 

아쉬운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이 한가해 보인다는 점이다. 반도체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판국에 여야(與野)가 반도체 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여당안(20%)은 물론 심지어 야당안(10%)에도 못 미치는 8%로 합의했다. 기획재정부가 그리 요구했다고 한다. 오래전 우리나라가 무슨 반도체를 만든다고라며 반대했던 경제기획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법인세 인하 폭도 기업들 기대보다는 낮았다. 그나마 정부에서 강성 노조에 대한 회계 투명성을 본격적으로 짚어 보겠다고 하는 점은 기업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일까. 그리고 과거에는 재벌오너에 좋은 일=재벌기업에 좋은 일=한국경제에 좋은 일이라는 등식이 통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들이 마치 정의(正義)를 독점한 듯 기업 지배구조는 이래야 저래야 한다고 재단하는 모습이 참 불편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어떻게 보느냐다. 시장 위에 서지 말기를 바란다.

 

재벌집 막내아들에는 무서운 멘트가 나온다. 진도준은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지만, 영웅이 추락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기업인이든, 정치인이든 한때 영광의 모델이었던 인사 중에 수치의 대상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아서다. 삼성이든 현대차든 LGSK,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격언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양철 회장이 구시대(舊時代) 기업관과 가치관을 지녔음에도 시청자들이 열광한 것은 작금의 우리 기업들 모습과 관계 있다. 통찰력과 상상력과 실행력이라곤 찾아보기 힘들고, 위기가 닥치면 직원들에게 복사지 절감부터 시키는 게 능사(能事)인 줄 알며, 자기 재산 챙기기에는 발벗고 나서는 기업인들을 자주 보아서다. 일부 재벌 후계자들은 단체로 마약 거래에도 손을 대고 있다. 아마 진양철 회장의 눈에는 심히 거슬렸을 것이다.

 

MZ세대도 재벌집 막내아들에 열광했다. 이병철 회장의 회고록 호암자전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재진입하기도 했다. SK의 어느 20대 직원은 이런 글을 적었다. “자동차도 전자제품이라는 생각,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반도체에 공격적인 투자진양철 회장같이 선구안을 가진 현명한 기업인이 절실한 요즘인 것 같아요.” 위기 상황에서 출발하는 2023년의 재계를 뚝심과 소신으로 구해줄 진양철과 진도준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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