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이야기] “첫 만남부터 손수 밥지어준 ‘박경리 인품’ 전하고 싶었죠”
매체명 : 한겨레   게재일 : 2022.10.19   조회수 : 118

도시계획학 전공자인 김형국(80)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는 19835월께 처음 박경리(1926~2008) 작가를 만났다. 19793(5)까지 나온 대하소설 <토지>를 읽고 흠뻑 빠진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소설 속 인물들의 생애 공간 이동표를 만들어 잡지 <뿌리깊은나무>(19805·6월호)에 실었다. 바로 이 잡지 글을 직접 전하려고 작가의 원주 단구동 자택을 찾은 것이다.

 

그는 이 만남 이후 박경리 문하로 출입할 수 있었고 199425년 만에 <토지>가 완간됐을 때는 기념행사 준비위원장까지 맡았다. 그는 작가 만년에 자택이 옛 한국토지공사에 수용되면서 후속책으로 토지문화관을 지을 때도 건축위원장을 맡았다.

 

작가를 만날 때마다 틈틈이 메모했다는 그가 최근 박경리 생애와 문학세계를 정리한 책 <박경리 이야기>(나남)를 냈다. 1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가 책에 박경리 문학의 출발은 결핍이었다고 쓴 것처럼 경남 통영에서 난 박금이’(박경리 본명)의 한 인간으로서 모습은 행복보다 고통에 훨씬 가까웠다. 어머니는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고, 작가의 남편은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결혼 6년 만에 홀로 된 작가는 9살 아들도 사고사로 잃었고, 사위(고 김지하)의 오랜 수형 생활에 힘들어하는 딸(고 김영주)의 고통도 옆에서 감내해야 했다.

 

이 분(박경리)처럼 불운하고 박복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 정도면 인격적으로 무너졌을 텐데 그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켰어요.” 김 교수에게 작가 박경리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나온 답이다. 이런 말도 했다. “6·25 때 작가가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토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작가는 내가 사는 이 슬픔이 가득한 차안에서 슬픔이 없는 피안으로 가야 하는데 그 길은 문학에 있다고 했죠.”

 

책은 평전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작가의 생애 전반을 속속들이 다루고 있지만 역시 가장 큰 특징은 저자와 작가의 인연에 바탕을 둔 기록들이다. “첫 만남에서 바로 금방 밥해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죠. 그분과 함께한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아요. 도우미도 없이 홀로 집에 딸린 꽤 넓은 텃밭 농사와 살림을 다 하면서도 손님 밥상까지 직접 차리셨죠. 무척 부지런하셨어요. 그 인품에 끌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더군요.”

 

저자는 16살 연상 작가와 처음부터 맞담배를 했단다. “저에게 대뜸 담배를 권하시더군요. 굉장히 낯가림하는 분이라 말문을 열기 위한 자기 무장해제 도구로 담배를 피우셨어요.” 그는 작가가 보인 고향 통영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나, 사는 내내 모친과 불화했던 작가가 자신을 만날 때는 늘 자신의 모친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도 책에 담았다. “제 어머니 안부를 묻는 어간에서 당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대리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도시계획 전문가로 토지읽고 매료

 

1983년 원주 자택 방문 문하생인연

1994토지완간 기념행사 위원장

말년 토지문화관 건축위원장도 맡아

 

생애·문학 정리 박경리 이야기

불운·고통 문학으로 승화시킨 분

 

책에는 작가의 인간적 약점이라고 할 만한 내용도 나온다. “피해의식이 강했다고 할까요. 토지문화관 공사를 마무리할 때인데요. 당신의 개인 집에 심은 소나무는 90만원에 샀는데 문화원 앞 소나무는 110만원이라면서 분노하시더군요. 업체가 돈을 빼먹는다는 의심이었죠. 이 말을 공사 소장에게 전하니 대기업이 물품을 납품받을 때는 10% 부가가치세를 내야 하니 개인 거래보다 돈이 더 들어간다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김 교수가 <토지>에 빠진 데는 역사책에서 접하기 힘든 20세기 전반 한반도 민초의 삶이 생생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소설에 나오는 경남 남해안 사투리였단다. 경남 마산(현 창원) 출신인 그는 <토지>를 수놓은 사투리를 보면서, 지방 말도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단다. “1960년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 오니 지역 차별이 있더군요. ‘경상도 새끼, 전라도 놈, 평안도 치같은 말을 많이 들었죠. 유교문화가 강한 경북 사람들도 밀양과 경주 아래 경남 사람들을 부를 때 하도 사람이라고 했죠. 아랫것들이란 말이죠.” 그는 같은 사투리를 쓰는 동향이라는 점이 작가와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면서 말을 보탰다. “작가와 처음 만났는데 저와 말투가 거의 같더군요. 제 모친도 평생 저한테 흥극이라고 했는데 작가도 첫 손주(김원보)은보라고 부르더군요.”

 

그는 박경리 문학을 탐구하면서 그 원천에는 굉장한 독서력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단다. “작가의 어머니가 딸을 구멍 지기라고 불렀답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책만 읽었다는 거죠. 작가 신혼 때도 이웃들이 저 집에 새댁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토지>에 나오는 강 포수의 걸쭉한 음담패설을 보면서 얼마나 책을 읽었으면 이런 표현이 나올까감탄했죠.”

 

박경리의 문학 자질은 어디에서 흘러 어디로 갔을까? “작가 어머니가 <숙영낭자전> 같은 옛 소설을 많이 읽으셨고 동네 사람들 모임에도 불려 가서 여흥으로 소설 암송을 했답니다. 이야기꾼이셨죠. 그 자질은 어릴 때부터 빼어난 그림을 그린 외손주 원보씨에게로 흘러갔다고 봐야죠.”

 

대작가와 교류하면서 받은 가장 큰 영향이 뭐냐고 하자 저도 그분과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책을 자평해달라는 질문에는 박경리 연구자들에게 박경리의 기초적 인격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그런 품은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답했다.

 

2014년부터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저자는 고 장욱진 화가와 김종학 화가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문학과 미술의 대가들한테 발견되는 공통점은 뭘까? “세운 뜻에 대한 집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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