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 기자 100년외] “이각경·송혜월...여성기자 ‘분투의 한 세기’에서 한국사회 변화 봤죠”
매체명 : 한겨레   게재일 : 2022.02.08   조회수 : 263

한국언론사와 영인본 권위자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한국의 여성기자 100년><네 건의 역사드라마> 출간

 

한국 언론사 연구의 대표적 학자이자 ‘영인본의 대가’로 불리는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84)에게도 지난달 두권의 새책을 펴낸 소회는 각별하다. <한국의 여성기자 100년>(나남)과 <네 건의 역사드라마>(소명출판)는 그가 각각 80년대와 70년대 발굴해낸 기록에서 시작했던 수십년 연구 장정의 마무리라 할수 있는 작업이다. 두 책 모두 딱딱한 연구서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흥미진진하게 읽을만한 대중서이다. 80대 중반 나이에도 왕성한 연구와 집필을 이어가는 그를 지난달말 서울 강남구 현대고등학교에 있는 ‘정진석 언론사료실’에서 만났다. 

 

2년 전 언론 관련 자료 및 책 9천여권을 기증하며 생긴 ‘정진석 언론사료실’은 한국 언론사뿐 아니라 현대사 연구의 ‘보고’ 같은 공간이다. <한성순보><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독립신문> 같은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에 발행된 신문을 비롯해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기간 4대 신문, 그리고 일제의 ‘보도지침’이라 할만한 경무국 도서과의 비밀자료를 발굴해 만든 <조선총독부 언론탄압자료총서> 영인본 세트 등으로 빼곡한 서고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는 물론 프린터도 변변히 없던 70년대부터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 카메라로 접사촬영하고 일일이 손으로 대조표를 작성하며 만든 영인본들이다.

 

한국여성기자협회는 지난해 창립 60년을 맞아 여성기자들의 에세이 모음 <유리는 깨질 때 더 빛난다>를 펴내는 것과 별도로 여성기자 한세기를 인물로 되돌아보는 책 집필을 그에게 의뢰했다. “1981년 제가 첫 여성기자인 이각경을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가 협회 전신인 한국여기자클럽 회장을 했던 정광모씨가 ‘이각경이란 여성이 <매일신보>에 글을 쓴 게 있다더라’는 말을 언뜻 해준 거였어요. 1921년 1월1일치에 거의 한개면을 다 채운 기명논설을 확인하고 그 전해에 실린 ‘부인기자 모집광고’도 찾아냈죠. 혹시 입사 당시 기사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어느날 새벽 영인본을 꺼내놓고 뒤지다 1920년 9월5일치에 실린 ‘입사의 변’을 발견했던 순간은 지금도 떠오릅니다.”

 

영국인 배설(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한국이름)이 창간한 항일적 논조의 <대한매일신보>를 일본이 빼앗아 만든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 성격이 강했다. 선구적으로 ‘부인기자’를 모집한 것도 당시 창간되던 민간신문들과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정 교수는 본다. 이각경의 경우 채 1년도 기자생활을 하지 않은데다 일찍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탓인지, 다른 기자들의 회고나 기록도 없다.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던 최은희를 지금까지도 ‘첫 여성기자’로 아는 이들이 적잖은 이유다.

그렇다고 첫 여성기자로서 이각경의 의미가 폄하될 순 없다. 입사의 변에서 이각경은 “우리사회는 예로부터 여자를 너무 멸시하고 무시하여 여자는 다만 남자의 종속적 물건으로 절대 복종하고 절대 무능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부인기자’라는 바이라인으로 이각경이 쓴 한 기사의 제목은 “자부를 둔 시부모여, 며느리도 당신의 자식이어늘 왜 그리 노예시하는가”였다. 기자가 되기 전 이각경이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임용될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 ‘서임급 사령’란에 이름이 실린 사실은 이번에 처음 확인한 것이라고 한다. “당대 최고 교육기관에서 공부했던 여성들이 기자가 됐죠. 개화기와 식민지 시절 여성기자들은 계몽사상가이거나 독립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정 교수는 잡지 <개벽>의 기자로 일찍이 1930년대초 남녀동일임금, 산전산후 특별휴일 도입 등을 주장했던 송계월도 인상 깊은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처음엔 기혼여성만 기자가 됐고 그 다음엔 결혼하면 언론사에서 내몰리기 일쑤고 ‘화초기자’라 불리기도 했지만 80, 90년대 이후엔 종군기자가 나오는 등 부서를 가리지않고 여성기자가 활약하는 시대가 됐다”며 “한세기 동안 분투해온 여성기자들을 조명하며 한국 사회 변화를 봤다”고 말했다.

 

일본이 <대한매일신보>의 두 주역 배설과 양기탁을 탄압하며 벌어졌던 재판 4건을 다룬 <네 건의 역사드라마>에선 일본의 한국 침략과 민족언론의 항일 기사를 놓고 벌어졌던 당시 치열한 법정 논쟁을 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영국인 판사와 검사가 서울에 와 재판을 진행하기도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재판이었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한 영어신문이 자신에 대한 ‘허위사실’을 썼다고 1908년 배설이 제기한 소송은 정정보도 청구 및 손배소의 원형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정 교수는 “1976년 대한매일신보 영인본 작업을 하며 배설 공판 기사가 실린 걸 보고 너무 놀라 사진을 찍어놨다. 이후 영국, 일본에서 공판 원본를 입수해 이번 책에 전문을 소개했으니 거의 반세기 만에 작업이 완결된 셈”이라고 말했다.

 

이번 두권의 책을 포함해 30권의 단독저서와 여러권의 공저가 있는 정 교수지만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작업은 16권에 이르는 영인출판 및 해제 집필이라고 한다. 한국신문연구소(현 언론재단)나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엘지 상남재단 같은 곳에서 출간한 경우가 많았지만, 대가로 영인본 한질을 받는 게 고작인 작업도 있었다. “옛 신문과 잡지는 개화사, 독립운동사, 정치사, 문화사를 포함한 현대사를 발생 당시에 기록한 역사연구의 1차사료”이며 “영인본은 연구자를 위한 나침반”이라는 그의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 교수는 또 언론자유수호 투쟁이 거셌던 70년대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기자협회보>의 편집실장을 맡았다가 박정희 정권에 쫓기기도 했고 관훈클럽의 초대 사무국장으로 ‘관훈토론’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이기에 언론의 책임이나 언론윤리를 모르는 일부 유튜버들까지 ‘기자’로 인식되는 요즘 상황이 더욱 안타까운 듯했다. “이윤추구 목적으로 출발했던 서구 신문과 달리 한국의 신문은 국민개화, 독립이란 거대한 목적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해방 이후 민주화 투쟁에도 언론이 큰 역할을 했고요. 신문의 영향력이 사라진 뉴미디어 시대라지만, 서재필과 장지연,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의 언론정신을 기자들이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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