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나무 아래의 즉흥]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매체명 : 대구일보   게재일 : 2018-03-05   조회수 : 163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 평생 변함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가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주어야 하오// 여자는 액자가 되어 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액자 속의 가훈처럼/ 평화롭고 의젓하게/ 여자는 조용히 넋을 팔아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가화만사성 액자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희미하게 매달려있다//(중략) // 세상의 딸들은/ 하늘을 박차는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날지를 못하는구나/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 문학선집『흰 나무 아래의 즉흥』(나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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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 페미니스트 여성시인의 오래전 시다.
페미니즘이란 남녀는 평등하며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이념 아래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법률적인 모든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여성해방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시각 또는 이론 체계를 의미하며 ‘여성해방’ 혹은 ‘여성주의’로 번역해 읽기도 한다.
‘여성해방운동’은 대체로 시에서 열거된 ‘여성적인 것’의 탈피를 전제하기 때문에,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요구들과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게 되어 있다.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려 할 때, 여성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관과 자신의 가치관 사이에 충돌과 분열을 불가피하게 경험한다.

현모양처 콤플렉스 또는 천사 콤플렉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갈등이다.
남성이 주체인 사회에서 여성은 무조건 착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분고분 길들면 성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마녀가 되고 마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으로 하여금 아이들에게는 현모이기를, 남편에게는 성녀, 간호사,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최근 까발려지는 추문들도 그 의식과 무관치 않다.
그러므로 여성은 늘 사랑을 베푸는 입장이 되어 자신의 감정은 배제된 채 ‘가화만사성’이라는 붙박이 액자로 못 박혀 걸려 있다.
필요하거나 생각날 때 그저 바라보아주면, 여성은 집안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언제나 ‘액자 속 모나리자의 미소’가 되어야 한다.
주체적인 삶은 온데간데없고 사랑이나 관습에 얽매여 사는 성녀로서의 삶이 온당한 여성적 삶이라 할 수 있겠는지 의문이다.
성녀의 삶이 옳은 것인지, 과연 마녀의 삶이 나쁘기만 한 건지 옳고 그름의 판단과 선택은 이 시가 처음 발표된 지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오늘의 화두가 되어 그들 스스로의 몫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불리며 그리 사는 걸 둘도 없는 행복이라고 여기는 여성들이 적지 않고, 남성들의 엄마와 아내에게 갖는 기대와 환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회의 편견에 싸여 마녀의 본능을 감춘 채, 어쩔 수 없이 성녀인 척 살아가는 여성들 또한 적지 않으리라. ‘미투’ 지지와 연대가 성폭력 고발에만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라는 탄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 방위로 뻗어나갈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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