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처럼], 2015-11-09, 베버, 김병일, 자본주의
매체명 : 문화일보   게재일 : 2015-11-09   조회수 : 766
조해동 / 경제산업부 차장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다. 학창 시절 읽은 가장 인상적인 책 가운데 하나였다. 30여 년이 흘러 자세한 내용은 잊었지만, 자본주의의 등장을 인간의 신심(信心)과 연결해 뛰어나게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때로는 험했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베버의 주장처럼 프로테스탄트가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본원적 자본 축적(資本 蓄積)이 이뤄졌고, 그것이 결국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불러왔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서양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퇴색하기는 했지만,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한 영국 중산층이 갖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 경제관(觀), 정치적 태도 등은 베버의 설명과 상당히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영국과는 꽤 다르지만, 2차 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도 적어도 건국 초기에는 베버가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필자는 개인적으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연원(淵源)이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 토양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고도성장을 해왔지만, 자본주의의 근간을 형성할 만한 정신적인 토양이 피폐했기 때문에 그동안 문제가 누적돼 왔다. 돈에 대한 철학이 없으니 돈 많은 사람은 청교도적인 검소함이나 절제된 생활을 할 이유가 없고, 돈이 적은 사람은 끔찍한 열패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것처럼 일부 재벌 후손들이 그토록 어긋나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신을 잃어버린 자본주의란 그만큼 썩기 쉬운 것이고, 그게 상식적인 일이다. 베버가 묘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뒷받침하는 시대가 오히려 매우 이례적일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2008년 2월부터 경북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선비 정신’을 현대적인 터미놀로지(terminology·용어법)로 설파하는 인물이다. 그는 선비 정신을 머나먼 경북 한쪽의 골짜기에 가둬두지 않고, 오늘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끄집어낸다.

그런 김 이사장이 얼마 전 ‘선비처럼’(도서출판 나남)이라는 책을 냈다고 한다. 박학다식하기로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책 말미에 붙인 권독서(勸讀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선비처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김 이사장 한 명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쪼록 김 이사장의 책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온갖 피폐함이 선비 정신이라는 넉넉한 울타리로 둘러쳐져 하루빨리 우리나라가 김 이사장이 꿈꾸는 ‘해피 엔딩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첨부파일 선비처럼 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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