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②], 2015-10-15,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가 아닌 자기 욕망의 주인이 돼야 한다
매체명 : 새전북신문   게재일 : 2015-10-15   조회수 : 988
기독교는 성(sexuality)을 “악, 죄, 타락, 죽음과 연결”짓는다. 심지어 성행위 중 정액유출은 신체마비를 불러일으킨다느니, 그로 말미암아 수치심을 생기게 한다느니, 종족번식에 장애가 됨으로써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느니 등등으로, 성을 금기시한다. 성행위는 ‘개인의 생명에 가장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만큼, “자기 자신을 해치고자 할 때에만” 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성의 역사 2 : 쾌락의 활용』 Lusage des Plaisirs 미셀 푸코 Michel Foucault 지음, 문경자외 옮김, 나남, 1990, p.28-9)

기껏 성행위를 허용해도 기독교는 일부일처에 한정한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거대한 동물에 불과할 뿐이지만 지상에서 가장 고상하며 지각 있는 동물이다. 코끼리는 결코 제 짝을 바꾸지 않으며 선택한 암컷을 정답게 사랑하지만, 3년에 한 번씩만 교미하는데 그것도 단지 5일 동안이며, 또 너무도 은밀히 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할 때는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러나 6일째 되는 날 모습을 나타내고는 곧장 강으로 가 몸을 씻는다. 자기가 깨끗해지기 전에는 절대 물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아름답고 정숙한 성질이 아닌가”(30-31)

코끼리 예찬은 ‘충실성’ 교훈이다. 그 ‘충실성’이란 “결혼 후에 자기 아내 이외의 그 누구와도 성관계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이다. 과연 이러한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까.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요구하기 시작한 걸까. 저 오래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요구는 찾아볼 수 없다.(32) 그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위는 “현대 유럽 사회에서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34)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위는 ‘자유’를 실현하는 활동이었다. 그런 만큼 성행위는 결혼을 넘어 동성관계에서도 가능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위는 ‘아프로디지아’(Aprodisia)로, ‘아프로디테의 행위’이다.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이 아니던가. 그러니 ‘아프로디지아’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어떤 형태의 쾌락을 제공해주는 행위, 몸짓, 접촉이다.”(50-52) 그것은 자연에서 비롯한 본능이다.

본능으로서 “자연은 행위의 수행이 쾌락과 연결되기를 원했다”(55) 쾌락을 얻으려는 움직임이 곧 욕망이다. 인간은 욕망을 피할 수 없다. 욕망이 얼마나 강하냐만이 문제이다. 아예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한정 충족시킬 수도 없는 것, 그게 욕망 아닌가. 그렇다면 “쾌락을 어떻게 <적절히> 취할 것인가? 이러한 활동을 절제하고 제한하고 조절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인가?”(67) 원칙은 단 하나,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지 말라,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쾌락은 동물도 바란다. 그렇지만 명예는 인간에게만 어울린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정복하도록 내버려두는 쾌락”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우두머리는 연약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내력에 의해 (다른) 개개인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76) ‘욕망의 주인’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이다. ‘소수’는 스스로 자기 행동을 바꿀 수 있어서 주인이다. (77)

주인은 자기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엔크라테이아’(Enkrateia)를 가진다. ‘엔크레테이아’는 쾌락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태도이다. 그 태도는 ‘자기를 제어하는 노력’이다.(80) ‘엔크레테이아’로 말미암아 ‘절제’(sophrosune)라는 미덕이 비로소 생긴다. ‘절제’는 어떤 욕망을 지배하는 상태이다. 절제는 곧 자기를 지배한 결과이다.

절제하는 “사람은 쾌락에 대해 전투태세를 취함으로써만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81) 절제는, 쾌락에 맞서고 쾌락과 겨루며 쾌락을 길들이려는 노력이다. 절제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쾌락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한다. 절제란, “쾌락과 욕망에 반대하는 것. 그것들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것들의 습격에 저항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들에 휩쓸려버리는 것, 그것들을 극복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에 극복되는 것, 그것들에 무장하거나 장비를 갖추는 것이 그것이다.”(82) 개인이 싸우는 대상은, 욕망이 아니라, 바로 자기이다.

쾌락은 언제나 “지배관계, 제어관계”에 놓인다. 욕망은 억제당해야 한다. 쾌락은 억눌려져야 한다. 무절제는 명령해야 할 자를 노예로 만든다. 절제는 스스로 노예이기를 거부함이다. 절제란 투쟁이다.(87) 투쟁이란 ‘훈련’이다.(88) “삶에서 훈련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훈련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물리치게 해준다.......쾌락 속에서 사는 습관을 지녔던 자들이 생활을 바꿔야만 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과는 달리 고통스런 일들을 견디도록 훈련받은 자들은 쉽사리 쾌락을 무시한다.”(90-91)

‘자유인’는 고대 그리스인이 품는 이상이었다. 스스로 자기에게 절대 권위를 가져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자유인은 ‘쾌락’에 사로잡힌 노예이기를 거부한다.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무절제한 사람은 ‘욕망의 노예’일 따름이다. (97) 특히 ‘욕망의 노예’는 그 어떤 주인보다 ‘최악의 주인’을 섬기게 된다.(98)

“가장 왕다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왕인 자이다.”(99) 자기를 지배할 수 있으면 그 누구라도 왕이다. 왕에게는 “어떤 쾌락의 노예도 되지” 않는 행동이 가장 잘 어울린다.(189)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위는 단순히 쾌락을 얻는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행위는, 절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절제란 자기를 지배함이다. 자기를 지배해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절제란 정녕 자유로워지려는 열망, 바로 그것이다./전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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