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패러독스의 시간], 2015-10-01, 살인·겁탈·질병… 12세 소녀 눈에 비친 6·25
매체명 : 문화일보   게재일 : 2015-10-01   조회수 : 893
이정은 장편소설 ‘그해 여름…’
참상 통해 이념의 허망함 조명

소설가 이정은의 장편 ‘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나남·사진)은 12세 소녀 수미의 눈으로 6·25전쟁의 비극을 그려낸다. 전쟁은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단순한 피난, 궁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념에 따른 분열과 갈등, 참전으로 인한 후유증, 아이의 죽음 등으로 인해 한 가족은 철저히 무너진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미네 일가는 서울에서 경기 용인 관곡마을로 내려왔다. 작은아버지 장호는 당시 해방 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토지를 샀다는 이유로 소작인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마을을 장악한 인민위원회는 장호를 반동분자로 낙인 찍어 옥에 가둔다. 반면, 장호의 여동생이자 수미의 고모인 창희는 인민위원회 여성동맹위원장으로 추대된다. 흠모하던 선생님 상현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장호의 아내는 시누이인 창희에게 장호를 빼내 달라고 사정하지만 외면당한다. 결국 국군이 용인을 수복한 이후에 장호는 평양으로 끌려가 가족과 이별하고, 창희는 경찰서에서 가진 고문과 모욕을 당한다. 전쟁이 낳은 불화로 가족은 풍비박산이 난다.

청년이었던 삼촌 태호도 폐인으로 남겨진다. 국군 창단 멤버로 참전한 태호는 임진강전투에서 낙오돼 탈영병 신세로 전락한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인민군이 됐다가 탈출해 다시 국군으로 싸우지만 전후 그는 소속이 불분명한 회색분자로 취급받는다. 인민위원회 리(里)위원장에 올랐던 수미네 머슴 옥동 또한 국군 수복 후 경찰서에 붙들려가 고초를 겪고 장애를 얻는다. 사랑하는 아내까지 양반에게 빼앗기고 결국 총살당한다. 저마다의 가장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살인과 겁탈, 질병 등으로 좌절한다. 수미의 남동생도 장티푸스로 숨을 거둔다.

소설은 전쟁이 만든 참상을 통해 이념의 허망함과 인간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 묻는다. 전쟁은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들을 만들어 낼 뿐이다. 좌우 세력의 엇갈림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운명이 바뀌고, 기회주의자가 판친다. 한 가족의 이야기만 담았지만, 이는 당시 한반도의 모든 가족이 겪었을 일상이다. 이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자전적 소설을 썼다. “국가가 힘이 없어서 백성을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사상을 따진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요”라는 등장인물의 울부짖음은 작가의 집필 의도를 오롯이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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