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2015-06-18, [북 리뷰] 위기의 승부사 정주영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
매체명 : 데일리한국   게재일 : 2015-06-18   조회수 : 1046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평가한 말이다. 한국이 1997년 외화 부족으로 경제 위기를 맞아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위기에서도 선뜻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킨 데 대한 찬사였다. 나폴레옹이 불굴의 정신으로 유럽 대륙을 정복하듯이 정주영은 경제 영토 개척에 나섰다는 것이다.

"돈은 길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줍기만 하면 된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근면이었다. 생전에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시간을 아껴 썼다. 지금의 고려대학교인 안암동 보성전문학교 석탑을 만드는 막노동을 하던 그가 세계적 기업의 회장님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영화처럼 처절하고 감동적이다.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저자 허영섭·나남)은 저자가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입사해 사회 초년병으로서 만난 전경련 회장으로부터 정치부 기자로서 다시 만난 통일국민당 대표의 모습까지 정주영의 궤적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전경련에서 근무한 뒤 경향신문 등에서 기자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정주영學 연구자를 자처할 정도로 정주영의 불꽃같은 삶에 애착을 갖고 있는 그가 20세기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신화를 이룩한 정주영이 태어난 순간부터 영면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를 뒤쫓는다.

어린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행을 택한 정주영은 신당동의 부흥상회라는 쌀집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물셋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넘겨받은 그는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주영 개인의 첫 사업체였다. 1939년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총독부가 전시 체제령을 내리고 양곡의 시장 판매를 금지했다. 그는 쌀가게를 정리한 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던 그의 사업체는 총독부의 통제에 의해 강제 합병을 당했다. 이후 광석 운반 일을 맡았던 그는 힘에 부쳐 하청 계약을 청산했다. 그가 외면한 일은 거짓말같이 문을 닫고 망해버렸다. 그가 선택한 일은 역경은 있어도 실패는 없었다.

8·15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떠나면서 버린 재산을 관리하던 정주영은 일본인 주택이 있던 자리에 공장을 짓고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현대라는 이름을 처음 쓴 것이다. 과거의 혼돈과 질곡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뜻이다. 미래를 만들어가는 바로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현대라고 지었다. 수리공장을 하면서 토건업에 뛰어든 그는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더 내걸었다.

수없이 실패하고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다시 일어서고 또 도전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했다. 6·25전쟁으로 현대건설의 기업 활동이 모두 중단되고 그는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정주영은 전란의 와중에 미군 공사를 발판으로 현대건설의 성공을 이끌었다. 정주영은 건설과 자동차를 중심으로 금융, 석유화학, 반도체 분야로 영역을 넓혔고, 어린 시절부터의 꿈인 대북 사업도 시작했다. 이른바 현대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화려한 성공 뒤 정주영이 유품으로 남긴 구두 세 켤레는 밑창이 닳아 있었다. 그는 밑창이 닳으면 질긴 타이어를 덧대 신기도 했을 정도로 검소했다. 광화문 시절의 현대그룹 사옥에는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정주영은 스스로 "부유한 노동자"라고 말할 정도로 특권 의식을 내세우지 않았다. 수행 비서도 없이 현대의 국산 승용차를 타고 다녀 호텔 직원들이 그를 종종 못 알아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사모님은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그의 아내 청운동 사모님 변중석도 그와 꼭 닮았다. 변 여사는 집에서는 언제나 통바지 차림이었고, 단골로 다니던 동대문시장이나 용산 청과물시장의 상인들도 현대의 안방마님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 책은 정주영의 죽음 이후 정주영 집안의 3세들과 날림 공사 비판, 그의 정치 참여에 대한 객관적 시각, 청와대와의 마찰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정주영의 인생과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내고 있다. 사교춤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시를 좋아하는 그의 말투, 불호령을 내리는 호랑이 회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 현대·삼성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간다는 자존심 싸움을 했다는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뒷얘기까지.

대한민국 경제는 언제쯤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중 ‘산업화 최고의 모범생’이라 찬사를 받던 대한민국이 휘청거리고 있다. 미래 성장동력은 보이지 않고 중국의 거센 추격과 폭발 직전의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저자는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정주영으로부터 힌트를 얻으려 한 것 같다.

"양자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듯이 나아간다. 내 후대는 앞으로 나보다 나아질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간절한 내 희망이다."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한 말이다. 정주영은 후대의 젊은이들이 자기를 뛰어넘어 더욱 역동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길 원했다. 이 책의 저자인 허 실장은 정주영의 공과를 모두 보려했는데 아무래도 잘한 점을 더 많이 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 저자가 던지려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정주영의 경제 기적은 거듭된 시련을 이겨낸 결과였다. 시련이 없었다면 성공도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프로필
서울대 사범대학,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과정,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경향신문·한국일보 논설위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광고특별위원회 위원장- 이데일리 논설실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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