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중국], 2015-06-09, 6·25 남침 65년…전쟁 억지력 더 키워야
매체명 : 문화일보   게재일 : 2015-06-09   조회수 : 1040
남성욱 / 고려대 교수·북한학,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스탈린은 1949년 12월 자신의 70세 생일 축하를 계기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소련 방문을 허락했다. 마오는 신중국 수립 이전인 1948년 5월과 1949년 4월 두 번에 걸쳐 모스크바 방문을 거절당한 후에야 생애 최초의 국외여행을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마오에게 비판적이었던 스탈린의 푸대접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환영식은 크렘린이 아닌 낡은 메트로폴 호텔에서 이뤄졌다.

마오는 1차 회담에서 만주에서의 소련 통치를 중지시키는 데 주력했다. 집요하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마오의 태도에 격노한 스탈린은 2주간이나 회담을 중지시켰다. 마오는 모스크바 교외에 위치한 스탈린의 별장 2층에 사실상 연금됐다. 소련과 신동맹조약을 체결하고 경제 원조를 받아야만 하는 마오로서는 스탈린의 냉대를 참아야 했다. 마오는 스탈린의 협조를 받아 만주를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친소파(親蘇派) 가오강(高崗)을 제거해야 했다. 2개월간의 줄다리기 협상 끝에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이 체결됐다. 마오는 훗날 “차라리 호랑이 입에 들어가 있는 고깃덩어리를 도로 뺏는 게 더 쉬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스탈린은 1948년 요시프 티토의 유고와 단절을 경험한 이후 중국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우려했다. 스탈린이 동아시아 정책을 입안하면서 가장 우려한 것은 미국과 연합하는 강력하고 통일된 중국의 출현이었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말에, 부정적이던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청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스탈린은 왜 김일성을 내세워 갑자기 한반도 전쟁을 기획하게 됐는가?

한국전쟁에는 두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첫째는 1950년 6월 27일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한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소련 대표가 불참한 것이다. 다음은, 김일성이 서울을 점령한 후 예상과 달리 신속하게 남진하지 못한 이유다. 2001년 리처드 손턴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의 연구서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의 기원’과 2005년 발굴된 스탈린의 비밀 전문은 당시 크렘린의 복심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스탈린의 6·25전쟁 의도를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다.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소련의 안보리 불참으로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미·중 대결장으로 만든다. 중국은 미국과 적이 되면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스탈린의 악몽이던 미·중 접근은 차단된다. 이런 시나리오가 성공하려면 북한군의 한국 점령이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고 황장엽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이 북한군의 남진을 고의로 늦췄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결국 6·25전쟁은 일진일퇴 접전 속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소모전으로 흘러갔다. 스탈린의 각본대로 진행됐다. 스탈린의 음모로 시작된 6·25는 그의 사망과 함께 끝났다. 6·25는 패자가 없는 전쟁으로 휴전하게 됐다. 폐허가 된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만 깃들었다.

3년여에 걸친 6·25전쟁으로 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1900만 명이 피해를 봤다. 최근 발간된 이세기 전 국토통일원 장관의 저서 ‘6·25 한국전쟁과 중국’은 6·25의 원인에서 중·소 양국의 갈등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6·25전쟁의 국제정치적 측면을 탁월하게 분석했다.

6·25전쟁 65주년을 맞았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대 강국의 세력 균형이 흔들리면 비극(悲劇)의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6·25의 경우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트루먼, 이승만 등 지도자들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얼룩졌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거대한 장기판에 놓인 하나의 졸(卒)에 불과했다. 빨치산 활동 경력이 전부인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당시 국제 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이 없었다. 정부 수립 2년 만에 전면 공격을 받은 한국은 남침 전날 군 수뇌부가 만취 상태였다. 정부와 국회는 5·10 총선거 후유증으로 사분오열됐다. 상대방의 오판(誤判)을 막는 비법은 강력한 억지력과 안보 의식이다.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국력만이 동북아 국제정치의 음모를 차단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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