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다른 시간], 2015-06-03, 같은 공간 다른 시간
매체명 : 국민일보   게재일 : 2015-06-04   조회수 : 981
1963년 연세대 법학과 대학원생 김중순씨는 전 국민 대상 법의식 조사를 위해 전국을 찾아다녔다. 1년 반 동안 표본에 추출된 사람들을 면접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500여 마을을 구석구석 누볐다. 우연히 방송 기회가 있어 조사 당시 보고 느낀 산하와 사람들의 모습은 200자 원고지 948매로 정리됐다.

반세기 전의 그 원고가 오롯이 출간됐다. 그 사이 법학도였던 저자는 미국 유학을 가 사회학 석사,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1년 귀국 전까지 미국에서 교수로 지냈다. 그가 유학을 간 사이에도 고향 생가 다락방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던 원고가 뒤늦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저자는 현재는 고려사이버대 총장으로 있다. 처지도, 시대도 달라졌지만 원문에 어떤 변형도 가하지 않고 당시의 날 것 원고 그대로 살린 게 이 책의 특징이다. 과거와 현격히 달라진 부분에 대해서만 살짝 부연 설명하는 정도에 그친다.

책은 그 시대의 감수성과 언어로 기록한 60년대 한국 서민과 지방의 풍속도다. 사실 거의 모든 문학이나 역사는 서울 중심으로 기록된다. 그런 공식 기록이 놓치는 지방, 그것도 농촌 중심으로 서술된다는 것이 매력이다. 그 시절 시골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과 삶의 방식이 흑백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투박하지만 진솔하게 펼쳐진다.

당시 조사를 위해 시골을 찾을 때마다 저자는 여관을 이용했다. 여관에는 반공 포스터가 어김없이 붙었고, 간첩 색출 목적 때문에 숙박객은 이름, 주소, 성명을 써야 했다. 이곳에는 가끔 서커스단이 집단 투숙해 특급 손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국적 섬 제주에서 접한 다도해와 강인한 해녀들, 낭만의 항도 목포에서 만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토박이 처녀, 울산 바닷가 마을의 자연을 닮은 구릿빛 사나이와 해맑은 아낙네…. 지역 마다 만나는 사람들 얘기가 정겹다.

또 ‘병풍 너머’ 인터뷰를 요구한 충북 괴산 양반 마을 할아버지나 금산에서 손부의 면접 때 시조부가 내내 참관했다는 일화 등도 눈에 띤다. ‘정체불명의 사나이’인 저자는 간첩으로 오인 받아 문전박대의 설움을 겪거나, 나라에서 시찰 나온 ‘높으신 분’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같은 국토라지만 제주에선 방언을 몰라 고등학생 통역이 필요했고, 경북 봉화에선 경상도 반가 양반들의 용어를 못 알아들어 졸지에 총각이 유부남이 됐던 사연도 흥미롭다.

저자는 그 시절 그 공간의 모습이 궁금해 2001년 귀국 후 일부러 몇몇 지역을 다시 찾기도 했다. 두 번째 여행에선 우리에게 익숙한 지금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전과 후의 모습이 대비되어 60년대의 풍속화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전글 [같은 공간,다른 시간], 2015-06-03, 1960년대 20대 법학도의 눈에 비친 우리네 일상
다음글 [나무 심는 마음], 2015-06-03, <신간> 나무 심는 마음·돌풍과 소강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