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협회 창립 첫 필화사건 주인공
매체명 : 기자협회보   게재일 : 2010-12-06   조회수 : 3594
5일 타계한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은 스스로 강조했듯 영원한 기자였다. 후배 기자들에게는 진실 보도를 위해선 한 번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진실한 선배이자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한국기자협회와의 인연도 깊었다. 1964년 8월17일 기자협회 창립 이후 첫 번째 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는 1957년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1964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직후 반공법 위반으로 첫 번째 구속을 당한다.

리영희 선생은 그해 11월21일 "아랍 공화국 등 회원국이 유엔 회의 개회에 앞서 남·북 공동가입안을 준비 중에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이 사실을 다룬 신문 13만부는 압류됐다.

한국기자협회 언론자유 분과는 이에 당시 공안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 등을 만나 항의하고 박정희 대통령에 성명서를 전달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1964년 12월15일자 기자협회보는 리영희 기자 석방 요구라는 제목의 1면 기사로 당시 사건을 자세히 싣고 있다. 2월15일자에는 그의 옥중 후기가 실려있다.

리영희 선생은 이와 관련 2004년 8월 기협 창립 40주년 기념인터뷰에서 "1964년 봄 조선일보로 옮겼고 이 때 기자협회도 창립됐다"며 "기자협회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문제가 나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965년에 외신부장이 됐는데 편집인협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기자협회에 들어갔다"며 "나의 사명감은 기자이니까, 또 영원히 기자이니까"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삶은 그리고 사상가로서의 삶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69년 베트남 전쟁 비판 기사를 썼다가 해직 당한 것이 한 예다.

리영희 선생은 당시 외신부장이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달리 각종 외신과 자료를 수집해 정확한 팩트를 근거로 베트남 전쟁, 중국혁명, 제3세계 혁명 등에 대해 썼다.

박정희 군부와 조선일보에선 리영희 선생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1966년 말 극우 반공주의자인 선우 휘씨가 편집국장이 되면서 갈등도 심해져 갔다.

리영희 선생은 "당시 편집국장은 극우 반공주의자로 베트남전쟁에 찬양하는 것으로 우리정권과 결탁했다"며 "그래서 정부, 사주, 편집국장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1969년 베트남 전쟁 비판 기사는 이런 내외부 상황을 뚫고 나왔고 결국 해직됐다. 그는 2004년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일보 부장직(외신부장)에서 군사독재정권의 모든 거짓에 반대하다 결국 쫓겨나면서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언론이라는 것은 거짓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나를 매수하기 위해 물질적, 권력적 유혹을 해왔지만 거절했어요. 그러니까 바로 탄압이 시작되더군요. 그래서 진실을 찾아내 우리생활 환경전반을 왜곡되게 의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할 자는 기자다라고 생각했죠. 나는 강자가 약자를 거짓으로 다스리는 그 행위를 범죄행위로 봐요. 진실을 전달하는 것은 매우 값진 것이지요. 진실은 나의 신념이요, 삶이라고 생각해요. 기자는 권력에 정절을 팔면 안돼요. 기자가 사명감을 가진 기자여야 값어치가 있지요."


1971년 합동통신서 해직
그는 1968년 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1년 간 노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절친했던 소설가 이병주 씨가 낸 출판사에서 책 배달 일을 한 것이다. 그 후 1년 뒤인 1970년 합동통신사 국제부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도 잠시 이듬해인 1971년 군부독재ㆍ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합동통신에서도 역시 해직됐다.

14년 간의 파란만장했던 기자생활을 접고 대학으로 간 이유다. 그렇게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로 옮겨 언론학자가 됐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기자협회보 기고문으로 고초

리영희 선생은 1973년 6월22일자 기자협회보에 ‘신문은 하나 둘 사라지는데…’라는 기고문을 실었다는 이유로 박기병 당시 기자협회장과 정진석 편집장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이 기고문은 비판 기능을 잃은 신문을 통렬하게 비판한 글이다. 선생은 이 글에서 당시 언론상황에 대해 “몇몇 신문이 지엽적인 문제에서 비판적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본질적 존재양식으로서는 반민중적이었다”며 “말하자면 민중과 권력의 사이에서 야누스적이고, 제이킬+하이드적 존재였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국언론의 병폐는 정부가 떳떳해 질 때 그 악순환의 마스터 링크가 끊어지는 것이지 언론업체의 그밖의 작용에 의한 통폐합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리영희 선생은 1974년 반공·냉전·극우 논리를 비판한 문제작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내는 등 군부의 눈 밖에 나 1976년과 1980년 두 차례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 조종자라는 등의 이유로 해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에는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기도 했으며, 1989년 방북취재를 계획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ㆍ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1백60일간 복역하기도 했다. 4차례의 해직, 10여차례의 구속과 구금 등 부침이 컸던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이런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수많은 역작을 내놨다.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전쟁 : 30년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종결, 역설의 변증 : 통일과 전후세계와 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자유인ㆍ자유인, 스핑크스의 코, 동굴속의 독백 등 저작들은 그의 삶이 그렇듯 실천하는 이성을 대변하고 있다.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고인의 뜻대로 8일 화장한 후 광주 5.18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든다.

2010.12.07 기자협회보
민왕기 기자 wank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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