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독재 항거에 ‘지적 대들보’로
매체명 : 한겨레신문   게재일 : 2010-12-09   조회수 : 3489
“나는 그 책을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나는 동료·후배들마다 그 책을 권했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네 머릿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그래서 진실을 안 데 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김세균 서울대 교수)
‘그 책’을 읽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같은 대학 조희연 교수는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고 했다.

1974년에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리영희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아시아·중국·한국>. 리영희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사, 우상 파괴자의 등장을 알린 그의 첫 단행본은 1970년대 유신 전체주의 억압체제하에서 “‘전논’이라는 은어로 불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해일과 같은’ 폭발력으로 퍼졌다.”(김삼웅 <리영희 평전>) 금서가 된 이 스테디셀러는 이처럼 권력의 감시망을 뚫고 떠돌고 회자되면서 20세기 말 한국사회 격동을 예비했다. 87년체제와 민주정부 탄생이 상징하는 한국 민주화와 변혁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주역들 다수가 그 세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는 분명히 ‘의식화의 원흉’이요 ‘주범’이었다.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보도태도,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미국사회를 분열과 해체상태로 몰아가던 반공주의세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의 언로차단과 비밀주의, 자유 억압이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논한 그 책 제1장은 이후 평생 변하지 않은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존재방식에 대한 예시였다. 코페르니쿠스처럼 ‘가설’임을 전제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그 책은 중국에 대한 접근을 축으로 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연쇄반응인 주한미군 감축, 그 자리를 대신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 그것이 야기할 한반도 정세의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조건반사의 토끼처럼 권력과 외세의 조종에 놀아나던 한국인들에게 토끼장에서 벗어나라고 절규한다. 그가 전한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으며, 그것은 결연하고 처연했던 그 뒤 한국사회의 변혁을 예고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유명한 선언적 머리말이 실린 <우상과 이성>(1977년, 한길사)은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이후의 세상변화까지 담은 그 책의 ‘속편’적 성격을 지니면서 그 책과 더불어 리영희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광복 32주년의 반성과 중국이란 나라, 베트남전 총평가, 냉전과 독일통일문제 등을 담아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이 책 두달 전에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가 나왔다. 1974년에 한양대가 설립한 ‘중국문제연구소’를 맡은 리영희의 중국연구 성과를 담은 <8억인과의 대화>는 해외 중국 전문가들 저술의 편역이었음에도 출간 약 2달만인 그해 11월1일 중장정보부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그 책이 판금당한 바로 그날 <우상과 이성>이 출간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던 그 상황에서 당국은 그 이념적 배후로 리영희를 지목했고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은 그를 반공법으로 옭아넣는 구실이 됐다. “1977년 11월23일 아침 7시, 나는 집에서 세 사람의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서재로 올라가 수백 권의 책을 훑어 꾸린 다음 ‘잠깐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1980년 초에야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년, 동광), <분단을 넘어서>(1984년, 한길사),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1987년, 두레)는 이스라엘-아랍 등 제3세계로 그의 시선을 더욱 넓히는 한편, 문화적 접근단계를 넘어 군사협력체제로 나아가던 한-일 보수정권 유착관계의 진화와 이를 뒤에서 조종한 미국의 세계정책 구상 분석을 중심으로 핵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그의 ‘80년대’ 저작들이다. 이들 80년대 저작 중에서 특별한 책 하나가 그의 탄생부터 5·16쿠데타 직후 그의 30대까지의 삶을 뒤돌아본 <역정>(1988년, 창비)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이후 말년까지 그가 여러 글과 책에서 회고하고 재인용한 그의 삶의 형적들의 원형을 이룬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가난했던 서울 유학시절, 문사기질의 그가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와 국립해양대 항해과에 들어가게 삶의 궤적과 백범 김구를 연모하며 4·19혁명에 뛰어들었던 얘기, 미군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한 7년간의 군대생활, 그때 목도한 군과 국가의 부패와 부도덕이 그의 인생지침을 돌려놓게 되는 과정, 언론사 입문 과정 등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장교 시절 군인들이 불쏘시개로 삼던 신흥사 목판경전들을 구한 얘기, 술 마신 기분에 호기를 부렸다가 도리어 준엄한 꾸중을 듣고 무릎꿇고 사죄해야 했던 어느 진주 기생의 기개와 인간적 무게를 보며 깨친 생각 등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自由人, 자유인>(1990년, 범우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두레), <스핑크스의 코>(1998년, 까치),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년, 삼인) 등 그의 ‘90년대 저작’들에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속히 진행된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를 지켜봐야 했던 리영희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고뇌가 깊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의 1970년대적 시선과 문제의식은 일관되게 유지되며 종교·문화·언론·통일문제를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1996년 지중해 일대를 여행한 뒤 쓴 <스핑크스의 코>는 지식·문화·종교·예술·정서 등 모든 면에서 오로지 자기 것만을 내세우며 약자에게 이를 강요한 지배적 문명, 그 폭력숭배와 잔인성, 반지성, 반문화, 몽매와 독단이 이집트 스핑크스의 코를 무참하게 뭉개버린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의 한국사회를 대비시킨다.

2005년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와 대담형식으로 엮은 회고록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리영희의 삶과 사상의 종합편이다. 리영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맡은 임 교수의 주도면밀한 진행에 따라 리영희의 삶과 기억들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풍부하게 종합된다. 원숙과 깊이, 그리고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까지 느낄 수 있는 <대화>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문제의식이 세상과의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당도한 변증법적 종합이라 할 수 있다.

2010.12.9 한겨레
한승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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