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말못할 창작의 고통 시구에 담아 날려보내
매체명 : 세계일보   게재일 : 2010-12-03   조회수 : 3648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박경리문학제
치욕 견디며 역사서 집필한 사마천 떠올리며 각오 다져
문학연구사와 초기 작품 해부·‘토지’ 심포지엄 등 마련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눈먼 말Ⅰ’)

연전에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고된 소설 쓰기로부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는 시를 썼다. 그래서 그가 생전에 남긴 5권의 시집에는 소설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기도 하고 추억을 되짚거나 일기처럼 일상을 기록한 시편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3일부터 4일까지 원주시 단구동 토지문학공원과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열리는 제1회 박경리문학제에 참가한 이승하 시인은 ‘박경리 시의 의미와 의의’라는 발제문을 통해 “박경리는 소설 속에서 할 수 없었던 창작의 소회를 시에서는 자유롭게 털어놓았다”면서 “시를 통해 소설가로서의 고통을 토로하고 각오를 피력”했다고 분석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옛날의 그 집’ 부분)

궁형의 치욕과 고통을 참아내며 역사서를 집필한 사마천을 떠올리며 자신의 처지를 그와 견주었던 박경리는 사마천이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진실을 기록하려 했던 것처럼 “이 세상 끝의 끝”에서도 소설가로서의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박경리가 25년 동안 3만장의 원고지에 풀어낸 ‘토지’는 9개의 잡지 신문에 발표됐고 6개의 출판사에서 간행됐으며 영·독·불 3개 국어로 번역됐다. 1회 이상 등장하여 이름을 지닌 허구적 인물만 578명에 이른다. 첫날 ‘‘토지’의 문학적 성격에 덧붙임’을 발표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토지’야말로 우리의 역사적 진행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그 사태를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서술하면서 그 뒤에는 한과 운명을 사랑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을 낭만주의적 열정으로 안타까이 껴안으려는 낭만주의적 정신의 소산”이라고 규정했다.

김씨는 ‘토지’에서 박경리가 구사하는 탁월한 어법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이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말의 고전적인 준수한 화법은 앞으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이 작품으로써 마지막이 될 언어적 성찬이 아닐까 안타깝다”면서 “박경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서 그가 높이 바라보아온 품위 있고 아름다운 고전적 세계도 함께 데려가 버린 듯하다”고 말했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박경리 문학 50년의 재조명’을 주제로 내걸고 열리는 제1회 박경리문학제는 강원도와 원주시가 후원하고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영주)에서 주최하는 행사다. 첫날에는 1부 ‘박경리 문학 연구사 및 초기작품 연구’와 2부 ‘‘토지’ 연구’로 이어지는 심포지엄에 김병익 박상민 이승윤 정호웅 이경 최유희 이상진씨가 발제자로 나섰다. 4일에는 조윤아 이승하씨의 발제에 이어 종합토론을 벌이고 소설가 윤흥길씨가 박경리를 추억한다. 이어 원주시 단구동 토지문학공원에서는 청소년백일장과 문화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박경리의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강원도와 원주시에서 여러 차례 제안을 했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했던 건 문학상 때문이었다”면서 “국내에는 이미 문학상이 너무 많을뿐더러 어머니도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여건이 되면 어머니 이름을 걸고 세계문학상을 만들 계획이지만 우선은 문학제를 알차게 준비해 나가겠다”면서 “내년 문학제에서는 문학포럼 외에도 생전에 어머님이 관심을 가지고 실천했던 환경, 생태, 생명 관련 포럼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0.12.03 세계일보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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