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매체명 : 한겨레21   게재일 : 2010-08-06   조회수 : 5240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아무것도 하지 않음 찬미하지만 천진하고 투명해 따분한 적 한 번도 없는 김영승의 시

소크라테스 이후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나 이른바 ‘소크라테스학파’를 형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시닉스(Cynics), 즉 견유(犬儒)학파다. ‘개처럼 살고 싶은 선비들의 모임’ 정도 되겠다. 이 모임의 대표자 격인 디오게네스가 가진 것이라곤 물 떠먹는 호박 사발뿐이었는데, 개가 사발 없이 물을 먹는 것을 보고 사발마저 버렸다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극단적인 무욕을 추구하고 세속적 가치를 냉소하는 급진주의자들이었다. ‘시니컬’(냉소적인)이라는 형용사가 그래서 생겨났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나 탄식한 일화는 유명하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 디오게네스는 시인이 아니었지만 시인들은 좀 디오게네스 같아도 좋겠다. ‘내가 시인이라면 디오게네스도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시인은 김영승이다. 그가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나남출판·2001)이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시민 김영승의 실제 생활이 어떠한지 나는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을 텐데, 적어도 시인 김영승의 목소리는 한국시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장무애하다. 그는 심오하게 적나라하고 정교하게 제멋대로인 시를 쓴다. 그의 첫 시집은 <반성>(민음사·1987)이고 가장 최근 시집은 <화창>(세계사·2008)이다. 특히 전자는, 약간만 과장하자면, 우리 또래 문청들에게는 거의 ‘전설’이었고, 후자는 그의 건재와 변화를 함께 보여준 반가운 시집이었다. 그의 최근 시 한 편 덕분에 나는 며칠이 즐거웠다. (원문의 한자들을 한글로 고친 것이 시인에게 너무 큰 결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군락지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및 노인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쌍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김영승, ‘흐린 날 미사일’ 전문, <문장 웹진> 2010년 6월호)

화자는 지금 인천 연수구 동춘동 어딘가에 있다. 거기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한다. 이런 식이다. 나는 걷는다, 나는 앉는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 나는 서 있다… 그리고 즐거워한다. 일단은 ‘내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발견이고, 거기에 은근한 자부심이 더해지면서 ‘이런 삶은 어떤가’ 하는 제안이 된다. 이 시를 두고 ‘무위(無爲)에의 찬미’ 운운한다면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좀 따분하다. 김영승의 시는 대체로 당연했던 적이 없으며 확실히 따분했던 적이 없고 이 시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마지막 문장을 만난다. “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 아, 이건 정말이지 멋진 마무리다. 그래, ‘무위’ 운운은 그 자체가 ‘인위’다. 그냥 저렇게 말해버리는 게 김영승이다. 매인 데가 없는 천진함, 그 천진한 눈에 비친 세상의 투명함, 근거 없어서 더 빛나는 자부심 등이 이 마지막 구절에 응축돼 있다.

화법은 가볍지만 질문마저 그렇진 않다. 작게는 한 개인의 생에서, 크게는 한 국가의 경영에서, 과연 무엇이 “급한 일”인지 이 시는 묻는다.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멋진 구절을 어떤 분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분께서 디오게네스를 만난 알렉산더처럼 탄식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위정자들은 급한 일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느라 늘 바쁘고 그것은 응당 그럴 법하지만, 때로는 넥타이 풀고 디오게네스의 통나무에 기대어서, 도대체가 ‘급하다’라는 게 뭔지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다. 국민의 65%가 반대해도, 여당이 지방선거에 참패를 해도, 장맛비가 내려 공사장에 난리가 나도, 스님께서 소신공양을 해도, 국책사업은 멈추지를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급한 일? 그런 게 어디 있나.

한겨레21 [2010.08.06 제822호]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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