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오늘]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 속 주옥 같은 시어 쏟아낸 조지훈
매체명 : 중앙일보   게재일 : 2010-05-17   조회수 : 4849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열아홉 청년 조지훈이 요즘도 애송되는 ‘승무(僧舞)’를 세상에 내놓으며 시인의 이름을 얻은 1939년은 일제가 ‘조선어 말살정책’에 시동을 건 바로 이듬해였다. “전통은 창조의 원천이요 그 형상의 질료(質料)이며, 창조는 전통의 의욕이요 그 계승의 방법이다.” 민족의 전통을 주옥 같은 시어로 그려낸 그의 시작(詩作) 활동은 일제의 일본어 사용 강제로 바람 앞에 등불 같던 모국어를 지키려 한 몸부림이자, 계급의식에 함몰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경향성에 대한 비판의 일침(一針)이었다. “시인은 민족시를 말하기 전에 그냥 시 자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시가 된 다음 그것이 민족시도 되고 세계시도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시의 전통이 확립되지 못한 이 땅의 시가 민족시로서 세계시에 가담하기 위하여서 먼저 일어날 것은 순수시 운동이 아닐 수 없다.”(‘순수시의 지향-민족시를 위하여’, 1947) 일제하부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시종일관 전통을 재발견해 민족을 지키려 한 민족의 시인이었던 그는 어떠한 정치적 지향도 시에 담기는 것을 터부시했다. 그의 시 세계가 오늘 우리의 심금을 여전히 울리는 이유는 그가 시다움을 우선한 진정한 시인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는 군국주의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일제 말 조선어학회의 한글사전 편찬을 돕고, ‘조선문인보국회’ 입회 강요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었다. 해방의 그날이 오자 그는 한글학회와 진단학회의 국어와 국사 교과서 편찬을 주도했으며, 건국 이후 『한국문화사서설』과 『한국민족운동사』 등을 펴낸 한국학 연구자이자,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갈증을 노래한 저항시인으로 우뚝 섰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威儀)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 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지조론』, 1962) 그가 귀천(歸天)한 지 42주년을 맞는 오늘. 5·16 군사쿠데타 직후 부화뇌동하는 정치인들에게 가한 그의 따끔한 한마디 충언(忠言)이 다시금 마음에 와 닿는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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