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매체명 : 민중의 소리   게재일 : 2010-05-31   조회수 : 4375
김종삼 전집ⓒ 민중의소리

김종삼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일관되게 쓴 시인이다. 대부분 10행 내외의 그의 시들은 그 분량과 비교가 안 되는 깊은 울림이 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시는 언어로 사유하는 부재(不在)이고, 그것은 곧 울림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시는 리듬에 대한 집착, 이미지에 대한 편향, 화려한 미사어구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 전문>

동시대 시인 김춘수가 평단의 화려한 조명을 받은 반면, 김종삼에 대한 깊이 있는 비평을 한 평론가는 김현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김현은 "북소리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사원의 파이프오르간을 치는 세자르 프랑크의 리듬이 거기 있었으니까."라고 김종삼의 시 <북치는 소년>을 평했다.

평론가 황동규는 김종삼 시의 울림은 공백을 통한 잔상효과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언어 습관이나 일상 생활면으로 보면 꼭 있어야 할 것을 꼭 있을 자리에서 빼버린 공백이 앞서 나온 시행들의 울림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과작(寡作)과 극단적인 공백, 농아들의 발화를 연상케 하는 어눌함, 암호를 방불케 하는 조어(造語)들의 창안과 구사 등은 한 이방인으로서의 시인의 시적 정서가 워낙 우리들과 교감될 수 없는 차별적인 것이었다.

평생 옥인동과 정릉 산꼭대기 같은 도심 변두리 단칸방을 전전했던 그는 변변한 직장 한 번 가져본 적이 없었다. 변변한 산문집 한 권 펴내지 않은 김종삼은 대신, 자신이 지어놓은 성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는 성채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불화하며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온몸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술과 서양 고전음악을 듣는 일뿐이었다. 세계와 겪는 불화의 내용을 자신의 성채 안에서 고요하게 적어나간 그의 시세계를 김현은 방황이라고 명명했다.

김종삼은 스스로 “나의 직장은 시(詩)”라고 하였고, 자신은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준 일밖에 없다”면서 평생 가난한 고백을 이어갔고, 그가 남긴 <북치는 소년>, <라산스카>, <물桶> 등은 우리 현대시가 내장한 최고의 감동이자 절창의 하나로 서슴없이 손꼽히고 있다.

김종삼 전집 l 권명옥 엮음 l 나남출판 l 373쪽 l 28,000원

김민형 기자 paranmir@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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