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당신은 직구인생? 커브인생?
매체명 : 머니투데이   게재일 : 2009-12-01   조회수 : 5263
내 삶과 현실의 거리 차이는 얼마나 될까. 문득문득 드는 질문에 한 시인은 18.44m라고 말했다.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가 마주한 거리. 긴장과 응시, 고요와 순간만이 있는 그 공간을 향해 우리는 기쁨과 슬픔, 감사와 한숨을 마구 던져 보낸다.

<비늘 : 삶의 무늬가 아로새겨진 은빛 날개(나남 펴냄)>은 그 이상야릇한 공간에 뿌려진 76편의 에세이다. 잘못된 호의는 사람을 잡고, 인생은 지고 있는 후반전을 뛰고 있는 것이라 믿는 저자는 영화와 소설 속 삶의 편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차분하지만 묘사적인 여성 특유의 성찰, 경어체와 평서체가 적절히 섞인 문장에 녹아들다 보면, 아침 햇살이 한없이 고맙다가도 왜 또 느닷없는 삶의 저항에 시달리게 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제목을 비늘로 한 게 재미있다. 바다 속에서 힘차게 꼬리칠 땐 살아있음을 빛내는 존재지만 잡혀서 도마 위에 오르면 바로 벗김을 당하는 비늘. 방어기제도 될 수 없고 실용적이지도 않지만 있음 그 자체로 삶을 빛나게 하는 비늘. 저자에게 글 조각은 비늘과 같은 것이다.

영화, 소설, 일상으로 챕터 구분은 돼 있지만, 저자의 생각 나무는 경계가 없이 자유롭다. "치명적 사랑은 거부해야 합니다." 영화 <미스트리스>를 손에 쥐고 신나게 썰을 풀던 저자는 은근슬쩍 <데미지>와 <붉은 비단보>로 옮겨 처절한 사랑의 상처를 툭툭 건드린다.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편에선 처음 메시지가 분명 인생의 편자였는데, 저자는 어느새 <산루이스의 다리>와 <만들어진 신>을 비교하며 신의 장난과 인재(人災) 사이의 경계를 묻는다.

제인 오스틴은 <설득>에서 행복한 불행과 불행한 행복이 모두 가능함을 증명했다. 그렇게나 인생은 이율배반의 연속이다. <적과 흑>,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야망보다는 사랑이 진실인 것 같지만, "아낌없이 빼앗는 게 사랑"이란 선덕여왕 미실의 대사를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다. 영화 <포 미니츠>는 외로움을 이겨내게 하는 만남의 소중함을 역설하지만, <레인 오버 미>를 보면 고독은 내일을 만들어 주는 소중한 보약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살만한 게 인생이 아닐까. 모순과 갈등, 후회와 번민에 늘 괴롭힘을 당해도, 죽은 듯 지내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오늘은 재테크 책 덮어놓고 삶의 향기에 코를 갖다 대 본다. 낙엽 사이로 열린 바람길에 맡기면 책장도 잘 넘어가는 계절이다.

◇ 비늘/권인옥 지음/나남 펴냄/343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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