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과 군대와 학교는 닮았다
매체명 : 한겨레신문   게재일 : 2009-11-01   조회수 : 4980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나남출판
<학교의 탄생> 이승원 지음, 휴머니스트

일본인들에게 쇠고기는 ‘혐오식품’이었다. 불교의 전통이 살생과 육식을 막았던 탓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쇠고기는 ‘문명개화의 음식’으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서양인처럼 키 크고 큰 체격을 갖추려면 ‘문명개화의 맛’을 알아야 한다나.

우리에게는 체조가 문명개화의 상징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운동을 ‘상놈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겼다. 그래서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고종 앞에서 ‘어설픈 춤’을 추었을 때, 관료들은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고종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더 열심히 배우라며 학생들에게 부채까지 선물했단다. 이 춤이 바로 체조였다.

세계를 향해 문을 막 연 조선은 서양의 힘센 나라들과 경쟁해야 했다. ‘체력은 곧 국력’이라는 말은 잘나가던 나라들이 하나같이 외치던 모토였다. 몸을 튼튼하게 하는 체조가 고종에게 남다르게 다가갔던 이유다.

세상 보는 눈이 날카롭다면, 이 지점에서 의문이 떠오를 테다. 운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축구, 농구, 배구 등등. 왜 하필 고종은 체조에 감동했을까? 먼저, 체조를 중요하게 다루는 기관이 어디인지 떠올려 보라. 군대, 감옥, 학교.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런 조직 안에서 근대문명의 특징을 찾아낸다.
체조할 때는 동작을 하나하나 나누어 각각을 세세하게 고쳐나간다. 군대의 훈련도 똑같다. 길들여서 표준화시키는 것은 근대문명의 특징이다. 그렇게 섬세하게 길들여진 사람들은 표준화된 부속품처럼 효과적으로 일터에 적응해 나갔다.

감옥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국가가 벌을 주는 목적이 ‘복수’에 있었다. 나라가 나서서 잘못한 사람들을 호되게 패주거나 죽여 버리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잘못을 했으니 죗값을 치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벌을 주는 목적은 차츰 보복에서 죄수들을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고쳐나가는 쪽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을 길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감옥은 군대와 비슷해진 셈이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푸코는 그 이유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만약 시위를 한 사람들을 ‘국가반역자’로 공개처형 하면 어떨까? 시민들은 화를 내며 정부에 더 강하게 맞서려 할지도 모른다. 3·1 운동 때도 사람들을 죽일수록 만세를 부르는 군중이 늘어나지 않았던가. 반면, 그들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가둔다면? 법이 섬세해질수록 이에 맞서려는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라는 말에는 화를 벌컥 내지만, “넌 지각을 많이 해”라는 지적에는 금방 고개를 숙인다. 세세한 법 규칙과 교정 노력은 사람들을 말 잘 듣게 하는 좋은 수단이다.

학교는 감옥과 군대를 합쳐놓은 모양새다. 학교는 생긴 것부터 묘하게 감옥을 닮았다. 그것도 삼중 감옥과 비슷하다. 감옥으로 치자면, 학교의 담벼락은 첫 번째 울타리인 셈이다. 학교 건물은 두 번째 장벽, 마지막으로 교실은 감방이 되겠다. 물론, 교실에는 교도관이 아닌 아닌 교사가 지키고 서 있다. 죄수를 관리한다는 감옥의 목적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것으로 바뀐다. 잘못을 고쳐서 더 훌륭하고 바람직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도 감옥과 학교는 닮았다.

학교는 군대와도 닮은꼴이다. 학교나 군대나, 모든 일과는 시간표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된다. 그 속의 사람들도 복장과 두발 규정 등, 규칙에 정해진 대로 자기 몸을 관리해야 한다. 훈련소에서는 군인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능력을 정해놓는다. 이에 이르지 못하면 이루어낼 때까지 거듭 훈련해야 한다. 학교에도 학업성취목표가 있다. 이를 채우지 못한 아이들은 학습부진아로 특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길들인다는 측면에서는 학교도 군대나 감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길들여 표준화시킨다는 근대적인 생각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예전에 잘 길들여진 ‘모범생’들에게는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규칙에 잘 적응했다 해서 꼭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현재의 상황은 식민지 시대 조선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들이 역할을 할 만한 자리는 아주 적었다. 교육받은 대다수는 졸업 후 실업자로 남았다. 그런데도 일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을 널리 퍼뜨렸다. 대졸 실업자가 넘쳐나는데도 대학에 목숨 거는 지금 학생들의 모습은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읽는 위인전에는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 같은 인물들이 나왔다. 하나같이 오랜 인격 수양으로 나라사랑이 절절해지신 분들이다. 푸코의 눈으로 보자면, 이들은 긴 노력 끝에 조직에 충성하는 자세를 몸에 익힌 근대적 인간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이 읽는 책에는 세종대왕, 박지원, 정약용, 신사임당 등이 많이 등장한다. 현대에 떠오르는 위인들은 결코 조직생활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성과 끼가 엿보이는 인물들이다. 시대가 변하면 바라는 인재상도 바뀐다.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의 뿌리는 감옥과 군대의 모습을 벗지 못한 우리네 학교인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과장이 될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_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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