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맘대로 되랴, 사는게 이렇거늘
매체명 : 한경비즈니스   게재일 : 2009-09-23   조회수 : 5209
이 주의 명작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이웃집에 노부부가 살았다. 슬하에 딸이 두 명 있는데 큰딸은 출가했고 둘째 딸은 혼기가 지났는데 결혼을 하지 않았다. 노부부의 근심에도 불구하고 마흔을 바라보는 둘째 딸은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하는 게 좋다는 것이 그 이유다. 큰딸은 결혼 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다.

노부부의 소원은 하루빨리 손자 손녀를 안아봤으면 하는 것이지만 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수십 억 원대의 재산에 드넓은 주택에 살고 있지만 아기의 웃음소리가 끊긴 집안은 1년 내내 적막하기만 하다.

① 톡·톡·톡= “사람 일생에 세 가지가 뜻대로 이루기 어렵다고 했으니, 자식이 그렇고 명리가 그렇고 수명이 그렇다고 했겠다.”

작가 조정래가 소설 ‘아리랑’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자식이야말로 가장 뜻대로 이루기 어려운 존재가 아닐까.

소설 ‘김약국의 딸들(나남 펴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통영을 배경으로 김약국의 스산한 가족사를 그리고 있는데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5자매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고 박경리 선생이 서른일곱 살 때 쓴 작품으로 그 나이에 3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소설을 썼다는 게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② 톡·톡·톡= “옛날에 자식 앞세우고 길을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배 안고프다 안 카드나. 이팔청춘이 잠깐이제. 눈 깜빡하는 사이제.”

소설에 나오는 이 구절은 그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도 나온다. ‘어머니가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배가 안고프다”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고 자식을 앞세우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이 소설은 딸들을 가진 어머니의 꿈을 알게 한다. 다섯 딸을 둔 한실댁은 딸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치 못해 대갓집 맏며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해 뉘 집 아들 자식과 바꿀까 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 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같이 어여쁘니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했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성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생각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이 있어 여느 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고 한실댁은 생각했다.

③ 톡·톡·톡= “맏딸이 잘 살아야 밑의 딸들이 잘 산다 카든데.”

그러나 맏딸 용숙이 과부가 됨으로써 한실댁의 첫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둘째 용빈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교사를 하는데, 딸들 중에서 그나마 인텔리의 모습을 보이지만 사랑에 실패한다. 셋째 용란은 결혼하기 전에 머슴의 아들인 한돌이와 사랑에 빠져 그만 아편쟁이이자 성불구자인 부잣집 아들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지만 이게 불행의 시작이다. 결국 미쳐버리고 나중에는 어머니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다. 넷째 용옥은 아버지를 늘 위하는 착한 딸인데 시아버지가 겁간하려고 하자 집을 뛰쳐나와 남편이 취직해 있는 부산으로 간다. 그날따라 남편은 아내를 보러 통영으로 오며 길이 엇갈린다. 결국 그날 밤 돌아오는 배가 전복되면서 아들을 안은 채 비명횡사하고 만다.

요즘 딸 가진 엄마들은 대놓고 “나처럼 궁상맞게 살지 마라. 재벌한테 시집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한다. “착하고 성실한 남자, 너만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 서로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라.” 이렇게 말해 주는 엄마는 별로 없다. “멋진 남자를 만나려면 네가 멋진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엄마도 별로 없다. 재벌 드라마에 너무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현실은 대부분 드라마와 같지 않다. 재벌과 결혼한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이 소설에서도 딸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다. 딸을 키우는 어머니에게 가슴 시리는 아픔을 준다. 시집갈 때 반짇고리까지 가지고 간 탐욕스러운 맏딸 용숙의 이야기를 대하면 절로 마음이 내려앉는다. ‘딸자식은 기둥뿌리까지 뽑아간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④ 톡·톡·톡= 집에 있는 침모와 하녀들이 혀를 내두른 것은, 용숙이 자기의 물건이라고는 실 한 바람, 골무 한 짝 빼놓지 않고 싹 쓸어간 일이었다.

과부가 된 용숙은 아들마저 혹처럼 귀찮아하며 “차라리 저런 거(아들)나 없었음…”이라며 신세를 한탄한다. 이를 듣고 어머니가 나무란다.

⑤ 톡·톡·톡= “그런 말 안 하니라. 부모 말이 문서라고. 그러다가 정말 없어보래, 적막강산이지.”

부모 말이 문서라는 말은 그 말이 씨가 되어 자녀에게 불행이 찾아오게 된다는 말일 게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용숙은 그럴수록 돈에 절대가치를 둔다. 이자놀이를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불린다.

용숙은 의사와 정분이 난다. 아이를 몰래 낳아 저수지에 버렸다는 소문이 돌고 의사의 부인이 고소해 의사와 용숙은 철창신세를 진다. 용숙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친정이 외면했다고 분을 삭이지 못한다. 어머니인 한실댁이 어장이 어려워지자 용숙을 찾아가 돈 500원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한다.

⑥ 톡·톡·톡= “저한테 무슨 돈이 있습네까. 나도 자식 데리고 살아야지요. 어디 윗목에 돈 싸놓고 사는 사람이 있습네까?”

대문 밖을 나서며 어머니는 가슴으로 운다. 그런 용숙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폐가가 된 집을 정리하면서 사흘에 걸쳐 가재도구를 챙겨 자신의 집으로 가져간다.

⑦ 톡·톡·톡= “아무래도 살림이사 묵은 기이 좋지. 요새는 어디 눈 닦고 볼라 캐도 이런 물건이 있어야제.”

딸들이 용숙이와 같다면 누가 딸을 키울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사윗감도 잘 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택서고망(擇壻苦望) 혹은 택부고망(擇婦苦望)이라는 말이 있다. 사위나 며느리를 맞고자 간절히 고대하던 마음을 뜻한다. 사람 사는 집에 가장 큰일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김약국네는 사위를 잘못 들인다. 강택진은 처가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장가를 왔다. 강택진은 처갓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장모(송씨 부인)의 환심을 산다. 결국 한밑천 잡은 참에 동문 밖에 약국을 하나 차렸다. 강택진은 아내 옥화가 죽자마자 돈 많은 과부의 딸과 혼인하고 또 옥화라는 작부와 바람을 피운다.

⑧ 톡·톡·톡= “사위새끼 괭이새끼라 안 합디까? 딸 없는 사위가 무슨 소용이우?”

김약국은 어장을 하다 원양어선에 손을 댄 후 실패하고 화병과 위암으로 죽게 된다. 둘째 딸 용빈과 막내딸 용혜의 결혼도 보지 못하고 생명이 사위어가는 김약국은 그저 쓸쓸하게 웃을 뿐이다.

⑨ 톡·톡·톡= “내 생전에 너 출가하는 것을 보겠나?”

용빈의 눈에서는 뜨거운 것이 화끈 솟는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남기고 세상을 뜬 자식들은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광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경리의 소설을 읽으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온기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흔히 ‘측은지심’이라고 한다. 사전적 풀이는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이다. 그 측은지심으로 박경리의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무척 편안해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영혼을 느낄 수 있다. 그 영혼이 안고 있는 문제는 어느새 우리 자신의 문제이자 우리 모두의 문제로 다가온다.

⑩ 톡·톡·톡=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하는 축제나 아닐는지.(소설 ‘토지’에서)

‘김약국의 딸들’은 찬 기운이 일기 시작하는 요즘 같은 때 읽기 적합한 책이다. 부모와 자식, 아들과 딸, 돈과 재산, 사랑과 결혼 등 욕망으로 뒤엉킨 세상살이를 측은지심으로 반추해 보게 한다.

최효찬 소장은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

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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