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선생을 보내고'토지'를 읽다
매체명 : 한겨레신문   게재일 : 2008-12-25   조회수 : 6037
최재봉의 문학풍경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다. 지난 5월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토지>를 읽지 않았다. 직업상 <토지>에 관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해야 할 때마다 천연덕스럽게 읽은 척 굴었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 글이었고 거짓말이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번역서를 근거로 그런 자신을 변호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태백산맥> <장길산> <임꺽정> 같은 다른 대하소설들은 거의 다 읽었으면서 어쩌자고 <토지>만은 빼놓았던 것일까. 대하소설 가운데서도 <토지>의 분량이 유독 긴 탓이었을까. 아니면 문학의 사회적 책무를 중시하는 ‘80년대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글쎄….

어쨌든 닷새에 걸친 문인장이 치러지는 내내, 그리고 장례가 다 끝난 뒤에도 한동안, <토지>를 읽지 않았다는 부담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올해 말까지 남은 기간 동안 <토지>를 독파하자는 목표를 세운 것은. 그렇게 해서 <토지> 첫 권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목표 달성에는 일단 실패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토지>는 전체가 21권짜리인데, 지금까지 14권을 읽었으니 3분의 2 지점까지 온 것이다. 변명의 여지 없이 게으름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내년 5월 선생의 1주기까지. 시간도 넉넉하다.

뒤늦게 읽기 시작한 <토지>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양에서만 방대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넓이와 깊이에서 두루 큰 소설이었다. 한마디로 <토지>는 우주를 닮은 소설이다. <토지>의 우주에서는 주인공이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최참판댁 상속녀 서희와 그의 남편이 되는 길상이 중심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소설이 그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지는 않는다. 김환, 용이, 월선, 봉순 같은 주변 인물들은 물론, 김평산과 귀녀, 강청댁과 임이네 같은 ‘비호감’형 인물들, 심지어는 소, 노루, 까마귀 같은 짐승들까지도 각자의 우주에서는 존재의 당당한 이유를 지닌 주인공으로 다루어진다.

가령 미친 여자 또출네가 자기만의 환영 속에서 “벌떼겉이 포졸들이 오는고나아! 내 아들이 동학당 우두머리라꼬요? 당치 않은 말씀 마오!”라 울부짖을 때, 또는 월선을 향한 질투로 용이에게 패악을 일삼는 강청댁이 새색시 시절 할미꽃 한움큼을 꺾어서 수줍게 용이에게 내밀던 장면이 회상될 때, 그들의 한과 슬픔은 기습처럼 독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두루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는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처럼 <토지>의 작가는 숱한 존재들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그들의 한을 풀어내고 슬픔을 다독인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뭇 생명의 어머니, 대모신(大母神)에 가깝다.

<토지>의 세계는 뭇 존재들이 어우러져 빚어낸 생명의 그물코요 인연의 인드라망이라 할 법하다. <토지>는 주인공 한두 사람에게 집중되거나 특정한 사건과 관념이 도드라지게 부각되는 소설이 아니다. 섬진강변 악양벌에서 출발해 만주와 일본, 경성과 진주 등으로 확산되는 이 소설은 민족사의 저변을 훑으며, 생명과 우주의 섭리를 묵묵히 아로새긴다. <토지>를 읽는 일은 이 섭리에 입회하는 의식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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