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빠진 유럽! 하버마스의 처방은?
매체명 : 프레시안   게재일 : 2011-11-25   조회수 : 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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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안진환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초대형 기획물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번역서는 원저가 나온 다음에서야 우리의 곁에 도착한다. 일본의 문화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리하여 모든 번역된 책들은 우편적(郵便的)인 것이 된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우편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게 되는 그 느낌(짐작컨대 우리는 지긋지긋한 번역 논쟁을 바로 이 우편적 불안의 개념 하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논의를 위한 지면이 아니므로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해보자). 이 서평에서 다루게 될 위르겐 하버마스의 <아, 유럽>(윤형식 옮김, 나남출판 펴냄)도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아, 유럽>은 하버마스가 2008년에 낸 책을 한국어로 옮겨 2011년 가을 무렵 출간한 책이다. 저자의 말을 보면 하버마스 본인이 책에 들어갈 내용을 엮은 시점은 2007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것이 편집과 교열 및 제작 등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책으로 독일어권에 출현한 시점이 2008년이며, 3년의 격차를 뛰어넘은 후 <아, 유럽>은 우리의 곁으로 왔다.

그리스 디폴트 위기로 인하여 유로화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해지고, 그로 인해 머나먼 한국의 투자자들마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며,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게 통과되어버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우리의 경제적·정치적 삶을 어찌 바꿔놓게 될지 다들 불안해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새삼스럽게 하버마스의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철학이 소비되는 맥락을 놓고 볼 때 이것은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버마스라니, 대체 언제적 하버마스인가? 게다가 그 하버마스가 하는 이야기라면 뭐 뻔하지 않을까? 설령 그가 나름대로 신선한 소리를 한다고 쳐도 그게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하버마스의 신간 <아, 유럽>을 소개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조명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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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첫 번째 질문의 폭력적 형식은 비단 하버마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철학자, 사상가의 논의를 거론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그냥 속편하게 저 문장 하나를 내뱉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대체 언제적 XXX인데?

가령 누군가가 한국의 행형 체계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 푸코를 인용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중요한 것은 그가 푸코를 인용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국의 감옥 내지는 수형 시설이 수형자에게 미시적이고 생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언제적 푸코인데, 아직까지 푸코 타령인가 하는 식으로 비판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뿐더러, 그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컨대 대한민국에서 한 사람의 철학자는 꾸준히 살아 숨 쉬고 활동하며 그의 동시대를 해석하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사고하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대신, 그 철학자에게 다들 우르르 달려들어서 뭔가 세상의 비밀을 단번에 해결해줄 것처럼 숭배하던 그 시절의 상징물로만 받아들여진다. 하버마스는 바로 그렇게 1990년대의 아이콘이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는 오직 그렇게만 기억되고 있다.

최신의 사상과 철학을 지향하겠다는 저 태도로 인해, 정작 우리는 실제 논의의 현장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 유럽>을 읽으면서 든 생각 중 첫 번째가 바로 그것이다. 제 정신이 박힌 독자라면 언제적 하버마스? 같은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우리에게는 일찌감치 철 지난 사상가로 취급당하고 있는 그가 정작 독일에서는 지금껏 꾸준히 의견을 생산하고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꿩은 자신이 땅속에 머리를 들이박으면 자신을 쫓아오던 여우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언제적 하버마스냐,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푸코냐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그 꿩과 다르게 보아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그러므로 대체 언제적 하버마스인데? 하는 식의 무식한 질문을 찍찍 내뱉는 치들을 향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하버마스도 바로 지금의 하버마스고, 푸코도 우리가 읽고 인용한다면 바로 지금 여기의 푸코라고.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박제로, 지난 시대의 산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이 그 철학자의 이름을 달달 외우며 세상에 대해 다 아는 척하던 그 시절에서부터 한 발자국도 나아가고 있지 못할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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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시피 <아, 유럽>은 독일이라는 특정한 국민 국가가 아니라 유럽 전체를 논의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책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의 이면에는 유럽 통합에 대한 옹호의 논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하버마스의 의도가 깔려있으며, 본인 역시 그 사실을 서문과 본문 속의 내용들을 통해 전혀 숨기지 않고 있다.

만약 이 책이 2008년에 동시적으로 한국어 권에 출현하였다면 이 책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심각하게 퇴색되었을 것이다. 2008년은 9월 이전과 이후로 나뉘며, 9월 금융 위기 후 몰락의 대상으로 지목받고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된 것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 우리는 그리스 디폴트 사태 및 연이은 유럽 국가의 위기를 통해, 비로소 유럽 공동체라는 구상과 유로화의 위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 즉,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시점은 바로 지금인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버마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990년대에 한국에 소개된 하버마스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에 맞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옹호하고 공론장에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성주의자였다. 이 책의 3부인 공론장의 이성에 대하여는 계속 그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으며, 가령 11장 민주주의는 아직도 인식적 차원을 갖는가?에서 하버마스가 내리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유럽 공론장의 결여에 대한) 해결책은 초국가적 공론장의 구축이 아니라 이미 존속하고 있는 각국의 공론장들의 국가 가로지르기(Transnationalisierung)이다." (221쪽, 강조는 저자)

즉, 하버마스는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상위의 공론장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현재 각각의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론장의 상호 소통과 중첩을 통해 유럽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공론장을 형성해나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9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국내에 소개된 그 하버마스의 맥락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소리이다.

하지만 1부와 2부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연, 신문 기고 등으로 이루어진 1부와 2부 중 전자는 개별적인 인물들, 특히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소개 내지는 비판에 할애되어 있고, 2부는 유럽 문제에 대한 강연 및 기고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미국 실용주의의 계승자로 여겨지는 리처드 로티에 대한 추모사, 미국의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로널드 드워킨에 대한 찬사 어린 축하 강연문 등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우리는 그 하버마스의 또 다른 얼굴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유럽 철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하버마스와, 현대 영미 철학의 분석적 경향성에 맞서서 이성에 대한 더 큰 회의주의적 관점 하에 극단적인 실용주의를 펼쳐나간 리처드 로티는, 서로를 알게 된 다음부터 진지한 학문적 교류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 로티가 하버마스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쓴 추도사가 바로 제3장 "…그리고 미국을, 그것의 강건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것"(35쪽)이다.

하버마스의 요약에 힘입어 아주 간략하게 로티의 이론을 소개해보자. 로티는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이성의 내용이 먼저 존재하며 그로 인해 정치적 선(善)이 결정된다는 전통적인 정치철학적 테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우리가 진리이며 이성적이라고 믿는 내용들이 모두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은 이성과 진리를 통해 사람들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설득해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티의 이와 같은 생각은 이성에 대한 정치의 우위라는 명제로 압축되었고,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적지 않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이론은 결정적인 것 하나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대체 왜 우리는 타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설득해야 하는가? 가령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자 증세 운동을 살펴보자. 양심적인 자유주의자였던 로티라면 분명히 그 운동에 찬성할 것이고, 본인이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대중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99퍼센트가 아닌 1퍼센트를 위한 방향으로 미국이 움직이고 있다면, 차라리 그 멍청이들이 계속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게 내버려두고, 로티와 같이 똑똑한 사람들은 1퍼센트에 속해버리는 것이 더욱 현명한 행동 아닐까?

로티가 만들어낸 회의주의는 이 질문에 대해 이성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지금처럼 나아가면 공동체의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그래봐야 공동체가 멸망하는 시점보다는 내가 죽는 게 더 빠르다고 예상된다면, 공동체에 해를 끼치며 내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로티는 결국 아주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애국주의, 즉 내가 속한 공동체를 무조건 사랑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웅변할 수밖에 없다.

리처드 로티는 그의 책 중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감동적인 <우리나라 이룩하기(Archieving Our Country)>를 통해 자신이 미국적 애국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을 공언하였는데, 이 애국주의는 세계가 그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애국주의입니다. 이 텍스트의 선율에는 그 원칙들이 갖는 규범적 내용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될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의 예외성에 대한 긍지(Exzeptionalismus)가 새로운, 이제는 전 세계에 걸친 문화적 다양성과 그 목소리의 다수성에 대한 감수성과 합쳐져 있습니다. (51쪽)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하버마스는 미국 철학자 로티의 미국적 애국주의를 옹호하고 있을까? 이 글이 추도사라는 것은 그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국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인 로널드 드워킨에 대한 축하 강연문에서도 같은 내용, 즉 미국적 애국주의에 대한 예찬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드워킨은 여망적 법개념(aspirational conception of law)을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미국적인 애국주의의 표현입니다. 이 애국주의의 자발적 원동력을 또 다른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우리나라 이룩하기(archieving our country)라는,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개념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로널드 드워킨은 최근에 나온 자신의 저서 <여기서 민주주의가 가능한가?(Is Democracy Possible Here?)>에서 자기 나라를 개선하겠다는 이 브레히트적 열망에 대해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버마스가 하나의 유럽을 옹호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초국가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에 맞서기 위한 정치적 추진력을 얻기 위하여. 둘째, 워싱턴 컨센서스와 맞서기 위해 독자적으로 세계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유럽 공동체의 필요성. 셋째, 이라크 전쟁 등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초법적 행위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유럽 차원에서의 단일한 구체적 무력 행사 가능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버마스는 "유럽이 유럽연합에 효율적인 결정의 절차들만이 아니라 자체 외무 장관과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과 자체적인 재정 기반을 만들어주는 개혁을 위해 떨쳐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110쪽)한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성적 도구로서, 그가 학자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시점부터 줄곧 주장해온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이 책에도 여전히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그 하버마스의 모습이다.

하지만 2008년의 하버마스는 동시에,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럽에도 미국적 애국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적 애국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우호적인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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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 거의 끝나가는 지금, 우리는 하버마스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왜 미국적 애국주의를 긍정적으로 소개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같은 화폐를 쓰고 있지만 다른 차원의 정치적 집단이 섞여 있는 곳이며 그리하여 현재의 유로존 위기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간략하게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재정 위기를 서술해보자. 잘 사는 독일과 못 사는 그리스가 갑자기 같은 화폐를 쓰게 되었다. 그리스의 구매력은 급상승했고 독일의 수출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가령 1마르크가 10드라크마였던 시절, 독일 소시지는 5마르크였다고 해보자. 그리스인이 5마르크짜리 소시지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50드라크마를 내야 했고, 너무 비쌌다.

하지만 유로화 통합 과정에서 1마르크가 1유로가 되고 5드라크마도 1유로가 된다면, 그리스인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독일 소시지와 그 외 온갖 선진국의 상품들이 반값이 된다. 독일인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당장 화폐 가치는 떨어졌지만 그만큼 유로 권역 내의 다른 국가들에서 엄청나게 수입해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흑자가 된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이기는 게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리스인들은 대체 그 돈을 어디서 구했나? 이런 저런 다양한 경로가 있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다 부채, 즉 빚이다. 미국인들은 개인적으로 집을 구입한 다음 그것을 담보삼아 현금인출기에서 돈 빼듯 신용카드를 긁어댔다.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나름의 방식이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 결과 막대한 양의 부채가 쌓였다. 당연히 그리스인들에게는 그것을 다 갚을 능력이 없다. 지금까지 빚을 내어 독일과 중국에서 이것저것 수입하며 살아온 것이 그들이 한 경제 활동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서 근본적으로 탈출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미국이 51개의 주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미합중국이듯이, 유럽 역시 유럽연합 가입국들이 연합하여 유럽합중국으로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그 경우 몬태나 주의 재정 적자를 텍사스 주의 재정 흑자로 메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인 것처럼, 그리스의 적자를 독일의 흑자로 채워주는 일 역시 당연한 일이 되고, 유럽 내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도 해소될 수 있다.

당연히 현재의 독일 국민들 뿐 아니라 그리스 국민들 역시 이와 같은 해결책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 중국, 한국, 일본, 대만, 태국, 베트남, 라오스 등이 하나의 연방 정부를 구성한다는 안에 당신이라면 찬성할 수 있겠는가? 물론 유럽 국가 간의 정서적·정치적 거리는 현재 동아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가깝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와 스페인이 한 나라로 거듭난다는 발상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주려 해도 유럽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순순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이성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하버마스가 본인의 트레이드마크인 공론장과 함께, 비이성적인 감정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애국주의를 동시에 옹호하는 희한한 광경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버마스를 포함한 유럽의 엘리트들이 꿈꾸는 유럽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공론장의 힘 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애국주의의 힘이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애초에 성립조차 불가능하다. 유럽의 문제를 토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없다면, 유럽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공론의 장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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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학자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현대의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는, 1990년대에 대한민국에 급격히 소개되면서 이른바 포스트 담론들의 대항마로 큰 각광을 받았고, 그 열풍이 시들해지면서 동시에 급격히 대한민국의 식자층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현실 정치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며 사회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 2008년에 등장한 책이 바로 <아, 유럽>이며, 우리는 2011년 그 책의 한국어판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야 제 우편함에 당도한 이 뒤늦은 편지와도 같은 책을 읽으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빠졌다.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외국의 학자들을 유행 따라 읽고 소개하는 한국의 지적 풍토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언제적 하버마스는 없다. 그는 꾸준히 그가 살고 있는 현재를 해석하고 그 현재와 상호 작용한다. 과거의 철학자를 과거의 유물로 만드는 것은 그를 그렇게밖에 치부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

특히 하버마스와 같이, 본인의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다른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해서 전달하는 일에 능숙한 철학자를, 단지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읽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손해다. 이 책 <아, 유럽>은 20세기의 중·후반부를 살아가는 현대 철학의 거목들의 진면모를 아주 짧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려낸 강연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거장의 손으로 (본인의 논지를 펴기 위한 왜곡 없이) 요약된 거장을 접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그 하버마스는 수십 개의 유럽 국가들을 묶어서 유럽을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기획을 머릿속에 품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성의 화신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성적인 공론장의 형성을 위해 필요한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애국주의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인들의 애국주의마저 옹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논의로부터 우리가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 하버마스가 아무리 헤르만 헬러, 리처드 로티, 데리다, 로널드 드워킨을 잘 요약해내고 있다 한들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유럽 통합의 위기에 대해 당장 활용 가능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우리는 하버마스와 같은 철학자가 아니라 유럽 저널리스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하버마스의 논의는 국제 정치를 전문적으로 배운 이들이 볼 때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나이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유럽>에서 우리가 진정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정보의 차원의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자면, 동시대의 문제에 비동시적으로 개입하는 지식인의 자세와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본인이 생각하는 철학적 당위를 위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적인 무기, 즉 정치적 공론장에 대한 이론과 함께,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입장인 미국적 애국주의마저도 포괄해내고자 시도한다. 그 시도는 아마 실패로 돌아갈 것이지만, 우리는 바로 그와 같은 실패의 시도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도착한 지금 이 시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절차적 타당성을 갖추지 못한 채 한미 FTA 및 부속법안 14개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찬성하는 측도 그렇지만, 반대하는 이들 역시 FTA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풀려서 유포하는 것 외에 그 어떤 담론적 전략이나 사상적 지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 옛날의 언제적 하버마스는 지금껏 현재의 문제와 이토록 싸우고 있는데, 그 늙은 철학자를 비웃어 넘기는 대한민국의 지적 종사자들은 대체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을까? 본인의 일관된 사유체계 속에서, 한미 FTA에 대해 찬성이면 찬성, 반대면 반대, 아무튼 논리다운 논리를 들이대어 이야기할 수 있는 철학자가 우리에게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하버마스가 한미 FTA에 대한 우리의 논의 수준을 본다면 대체 뭐라고 할까?

<아, 유럽>을 읽으며 한국 외 세계의 담론의 진행을 더듬어보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천천히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현재, 현재의 철학, 철학과 현실의 상호 작용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최수태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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