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경리 선생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 발굴 첫 소개
매체명 : 동아일보   게재일 : 2008-07-18   조회수 : 6899
원고지 63장 분량

역사에 땜질하고, 아닌 것도 그렇다 하고…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 선생(1926∼2008)의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가 발굴됐다. 고인의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유품 정리 중 미발표 육필 원고를 찾았고 최근 일본 문제가 불거지며 공개를 결심했다”고 17일 밝혔다. 일본산고 1편 ‘증오의 근원’과 2편 ‘신국의 허상’은 각각 200자 원고지 25장 안팎으로 완성본이지만 3편 ‘동경 까마귀’는 13장으로 미완이다. 김 관장은 “15년여 전에 씌어진 원고로 추정된다. 고인께서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으신 만큼 일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하셨다”면서 “한 권으로 완결 짓지 못하셨지만 작가적 직관과 감수성으로 일본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기 위해 오래 고심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산고’ 3편을 요약 게재한다.》

<1>憎惡(증오)의 根源(근원)

해방 후, 1950년 일본서 초판을 발행한 古易문예사전 동양편을 보면 문예사조 항목에 무려 26페이지가 일본문학을 위해 할애되어 있고 중국문학이 12페이지, 인도문학이 약 5페이지, 아라비아 페르시아 남방아세아가 각각 1페이지 안팎, 다음은 일본주변문학으로 묶었는데 아이누, 유구, 대만 순으로, 그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조선문학이라 하여 반 페이지를 쓰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일은 다반사요, 우리 민족문화를 홀대하는 일본의 처사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도 아니다. 신물 나게 겪어왔고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 거의가 불감증 상태다. 우리 문화를 홀대했다 하여 감정적으로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이라 해야 할까 그것 때문에 붓을 들었고 미묘한 깨달음은 오랜 옛날 묻혀버린 시간의 수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일본에 일방적으로 우리가 당해 왔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원한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고 의식 깊은 곳에 물려 있는 증오의 가시는 여간하여 뽑아내기 어렵다는, 이것이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들 공통된 감정이며 인식이다. 한데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이 더 오래이며 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잠재된 과거의 열등감이 우리 민족문화를 짓이기려 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복자의 속성이라는 꽤 관대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집요함은 열등감의 발로나 정복자의 속성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결코 일본주변문학을 집필한 다케시다 가즈마(竹下數馬)라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설혹 출판사의 방침이었다 해도 그것엔 관심 없다. 모두 지엽적인 것이며 개인이나 출판사의 편견이기보다 일본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심어진 선험적인 것,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것, 바로 그것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일본은 아이누, 유구, 대만에 대해서는 부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조상에 관한 한, 민족원류에 관해서는. 그들은 부인한다. 원류를 부인하면서 한국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 집요하게 광적으로.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 저 ‘日本의 역사’에서 인종에 관한 것을 발췌해 보면 조몬(繩文)토기시대, 일본인종의 원형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고 후에 한국에서 높은 야요이토기문화(彌生式土器文化)가 들어와 지배했는데 신래인종이 조몬 시대인을 멸망시켰는지 혼혈이 되어 인종적 특성이 말살되었는지 그러나 조몬 시대인에게 흡수되었으리라는 것이 일본 인류학자들의 통설이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은 도래인이라 표현하는 한족(韓族)이 그들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심정일 것이며 가능하다면 일본인종을 일본열도 고유의 인종이기를 바라는 것이 본심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 우리와 일본이 동족 어쩌고 하는 것도 실은 진부한 얘기다. 역사 연구의 영역일 뿐, 터럭만큼의 동질감도 없는 마당에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다. 서로 이해하게 되면 좋고, 다만 인류라는 자각으로 나를 다스려가며 앞으로 이 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

<2>神國(신국)의 虛相(허상)

신국(神國)은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온 용어다. 생각해 보면 일본만큼 ‘天’ 자와 ‘神’자를 애용하는 나라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왕의 이름도 그렇고 일반인의 성씨 지명 등, 거룩하고 덩치 큰 글자를 푸짐하게 쓰고 있다. 神武 崇神 神功皇后 天智 天武라는 왕, 왕후 이름에서부터 天田 天野 神山이라는 성씨, 지명으로 떠오르는 것에 神戶 神田 天域, 연호에도 天承 天治 神兵에서 軍神 神風 神器, 도처에 신궁(神宮)이 있고 신사(神社)가 있으며 ‘天’자를 쓰되 중국은 天子인 데 비하여 일본은 天皇, 지상을 다스리기보다는 하늘의 황제인 셈이다.

에도시대 후기, 국학자 사대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히라다 아쓰다네는 시인이기도 한 사람인데 그 당시 일본 존중의 열풍이 대단했다. 그래 그랬겠지만 신대문자(神大文字)라고 그가 들고 나온 것이 놀랍게도 우리 한글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신대문자로서 한국에까지 전달되어 언문이 되었노라, 배꼽 잡고 웃을 주장을 한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 그야말로 지겹게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과거 일본의 역사학, 특히 국사학의 학자들은 황국사관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역사에 무수히 많은 땜질을 했고 또 많이 쏠아내고 했으며 한일 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도 다 아는 일이거니와 그러나 안다는 그 자체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사실이 이렇고 저렇고 해봐야 소용이 없고 학자의 양심 운운했다가는 바보가 된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날조된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피해 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고 고래심줄 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분명한 것을 아니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씨가 마르게 사내들이 죽어간 2차대전, 일본의 악몽은 사람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존재하는 거짓의 그 황도주의 때문이다. 가타비라(한 겹의 일본 옷·유子)같이 속이 비어 있는 신국사상에 매달려온 일본인의 역사의식 그것의 극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으로, 야심 없는 이웃으로 마주보기 위하여,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백가신도(伯家神道)에서는 일본인은 신의 자손으로 즉 신이다. 일본 신도(神道)의 한 분파에서는 일본을 만국의 종주국이라 했고 후지산은 지구의 진수(鎭守)라 하는 과대망상, 그런 망상은 후일 세계 정복을 꿈꾸는 망상으로 발전했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이 유가 아니다. 고사기도 예외는 아니다. 황도사상의 골수라 할 수 있는 신대편(神代篇)에는 도처에 그 모순이 노정되어 있다.

왕권 확립을 위하여 왕실 미화는 필수조건이며 따라서 날조와 삭제 표절은 불가피한 일이다. 신화란 어느 곳에서든 세월 따라서 삭제되고 날조하고 표절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해서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은 이야기는 거짓말이요 노래는 참말이라 했던 것이다. 어떤 민족이든 그 기원에 신화 없는 민족은 없다.

<3>동경까마귀

여유작작하다/사람 사는 언저리 아니면 못사는 주제에/사람의 눈치쯤 아랑곳없이/정거장 둘레를 어슬렁거리다가도/지갑을 줍듯 먹어만 보면/스윽 달아난다.

장호 시인의 시집 ‘동경까마귀’ 속의 시 한 구절이다.

일본에는 까마귀가 많다고 한다. 소설이나 시(俳句)에도 까마귀는 곧잘 나타난다. 유행가, 동요, 심지어 자장가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처럼 혐오감으로 그 새를 대하지 않는 모양이고 그들 정서 속에 녹아들어 있는 듯 보인다.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짙은 우수와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그리고 어둡다. 해서 고천(枯天)에 앉은 겨울까마귀는 그들 정서의 근사치며 우리의 경쾌한 새타령이 주는 느낌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림장이 이중섭은 일본에서 돌아오는/길에/민둥산 붉은 흙을 비행기에서 내다보고서/눈물이 나더라고 말했지만/(중략) 부산 영주동 까치집이 내다보이는 우리 집에 와서도 그랬고/정릉 골짜기 까치집이 있는 하숙집에서도 그랬듯이/까치만 쳐다보면 늘 그는 입을 반푼이처럼 헤벌레 하고 있었겄다.(‘까마귀에 쫓겨 온 이중섭’)

까마귀와 까치의 대비는 민족과 민족 간의 숨 막히게 다른 뉘앙스를 느끼게 하지만 화가 이중섭의 개인적 고뇌, 민족적 슬픔, 내 강산에 대한 짙고 애틋한 애정이 느껴져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일제하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내 자신의 눈물, 내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게 되는 구절이다.

옛날 서울 정릉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산동네여서 일꾼들을 불러다가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은 일이 있었다. 일하면서 주고받는 그들 대화를 듣자니까 징용 가다가 도망친 얘기였다. 뼈가 바스라진다는 둥 험악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증오와 원한이 없었다. 때론 웃고 익살스러운 몸짓을 하며 일하는 것처럼 슬렁슬렁하는 말투가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었다. 낙천이랄까 해학이랄까 그런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을 것이며 또 바로 그런 낙천적 해학이 갖는 여유 때문에 끝내는 희생하여 이 민족이 망하지 않고 긴 세월 존속돼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정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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