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기자의 컬처 메일] 박경리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
매체명 : 조선일보   게재일 : 2008-05-19   조회수 : 6687
"내가 원래 시인 지망생이었어요. 여학교 다닐 적에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시만 썼지요, 교과서 속에 시집을 숨겨놓고 수업시간 중에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키기도 하고, 하하…"

지난 5월 8일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사진>는 3월24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갖던 중 문학소녀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치 그때가 눈앞에 잡히는 듯 즐거워했습니다. 4월4일 의식불명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기 11일 전에 이뤄진 이날 인터뷰 〈본지 3월31일자 보도〉는 결국 작가가 응한 생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됐습니다.

신문 지면 제약 때문에 활자화하지 못한 작가의 말씀이 마치 도사리 처럼 제 취재 수첩에 남아있습니다. 도사리는 다 익지 못한 채로 떨어진 과실 혹은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아파도 누워있는 성미가 아니지, 도사리 같이 살아나질 않겠소라고 대하소설 《토지》에서 생명력 질긴 민초(民草)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더군요.

25년 동안 200자 원고지 4만여장에 무려 600여명의 인물을 숨쉬게 했던 대하소설의 작가 박경리는 뜻밖에 "앞으로 쓰고 싶은 거라면 시"라면서 러시아 시인 예세닌의 시 한편을 기억 속에서 불러냈습니다. 비뚤어진 미소일랑 집어치워/ 나는 지금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 너는 아니다/ 너는 너 자신이 알고 있을거야/ 잘 알고 있고 말고/ 내가 쳐다보는 것은 네가 아니다/ 너에게 온 것도 아니다/ 네 옆을 그냥 지나쳐도/ 내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아/ 다만/ 창문을 들여다 보았을 뿐이야(시〈손을 부비며〉전문)

예세닌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과 해후했으나, 다시 각자 갈 길을 가면서 쓴 시입니다. 작가는 "이 짧은 시 한편에는 긴 소설 여러 편으로 할 이야기가 다 들어있어요"라며 "이것이 시의 힘이 아니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시 한편, 그것이 박경리의 시론(詩論)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는 시로 쓸 만한 것들이 참 많아요"라고 한 작가는 눈 먼 구렁이 갈밭에 든다를 예로 들었습니다.

원래 무엇인지, 어디인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이 속담은 작가의 입에서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어미가 불효하는 자식한테 쓸 수 있는 속담이에요. 내가 죽은 뒤 후회를 하면 뭐 하느냐. 눈 먼 구렁이가 까칠까칠한 갈대밭에서 온몸이 찔리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 할거야라고 일깨워주는 거지요."

그래서일까요. 작가가 마지막으로 월간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신작시 3편 중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보다라며 끝납니다. 작가는 저 세상에서 꿈에 그리던 모친을 만났을까요. 이제는 모친상을 당한 한국문학이 꿈 속에서 어머니를 벌써 그리워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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