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거목 ‘천상의 토지’로 떠나다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08-05-06   조회수 : 7165
25년간 집필한 ‘토지’ 민족문화의 보고…생명의 가치 전도하며 말년까지 창작혼

5일 별세한 박경리 선생은 한국 현대문학의 큰 나무이자 세상의 고통과 생명을 품에 안은 넓은 강이었다.

전쟁과 독재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어낸 고인은 20세기 한국사를 ‘토지’라는 거대한 피륙으로 직조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5년간 스스로를 글 감옥에 가두고 한 작품에 매진했던 고인은, 노년에 들어 생명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토지문화관을 설립해 후배작가들의 뒷바라지에 애썼다.

고인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한 탓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져 진주고녀를 1년 늦게 졸업했다. 이듬해인 46년 김행도와 결혼, 딸 영주씨 등 1남1녀를 두었으나 6·25전쟁 중 남편이 납북되는 바람에 홀몸이 됐고, 전쟁 직후 아들을 잃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 상업은행 본점에 다니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시를 보여줬다. 그후 “시보다는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동리의 권유에 따라 단편 ‘불안시대’를 썼고 55년 ‘현대문학’에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돼 문단에 나왔다.

고인은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가 장편으로 옮겨갔다. ‘계산’ ‘불신시대’ ‘암흑시대’ 등 초기 단편은 작가의 신변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그후 ‘성녀와 마녀’(60년), ‘김약국의 딸들’(62년), ‘시장과 전장’(64년) 등의 장편을 발표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성녀와 마녀’는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 여성의 삶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또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집 다섯 딸과 어머니 한실댁의 삶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렸으며,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행복과 이념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그러나 박경리의 본격적인 작가인생은 ‘토지’와 함께 꽃피웠다. 43세이던 69년 시작해 68세인 94년까지 25년간 5부로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21권)는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최고, 최대의 역작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기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원고지 4만장에 써내려갔다. 몰락한 최참판댁 손녀 서희와 그의 남편이 되는 하인 길상이를 비롯해 700여명의 인물이 명멸하는 이 작품은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은 역사소설과 달리,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민족의 역사를 형상화해 ‘창안적 역사소설’(이재선 서강대 명예교수)로 명명됐으며 ‘역사보다 더 역사적인 소설’(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토지’는 주인공이 따로 없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뼈마디와 실핏줄처럼 얽혀있는 탈중심적 성격으로 서구소설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을 보여주는 동시에, 2500여개의 독특한 어휘와 방언, 속담, 풍속, 제도 등을 담은 사전이 발간될 만큼 민족문화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작품이다.

고인은 운명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다뤘다. ‘토지’는 물론이고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의 주인공은 모두 운명이라는 초인간적 힘 앞에 선 문제적 인간이다. 이는 작가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불행은 전쟁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데서 그치지 않고 사위 김지하 시인의 민주화운동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인지 작가는 평범한 삶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생이 행복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유명한 딸보다는 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효도인데 나는 불효막심했다”는 회한을 쏟아내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직전 통영을 떠났던 그가 2004년까지 50여년간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창작활동으로 바빴다”고 하지만 고향에 불행한 추억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토지’의 주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 역시 집필기간 동안 일절 방문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료에 의존한다든지, 생생한 현장이 작가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만년의 그는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였으며 후배작가들을 뒷바라지하는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했다. 작가가 17년 동안 살던 강원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도시계획으로 사라지는 것에 반대한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으로 99년 5월 토지문학공원이 세워졌다.

이곳은 문화계 인사들의 집필실이자 문화사랑방이었다. 2006년에는 사재를 털어 창작전용관을 세웠다. 작가는 이곳에서 낮에 텃밭을 가꾸고 밤에는 글을 쓰는 단박한 일상을 영위했다.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았던 작가 윤대녕씨는 “후배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인사조차 받지 않으시면서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 내려보내셨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2003년 ‘토지’의 후속편인 지식인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시작했으나 ‘현대문학’에 연재하다가 건강 악화로 중단했으며, 지난 3월에는 8년 만에 ‘까치설’ 등 시 3편을 역시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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