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 촉발한 ‘그’ 책
매체명 : 한겨레신문   게재일 : 2009-10-17   조회수 : 5318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사진)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다. 프랑스 지식계를 뒤흔들었던 1960년대 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의 진원이 된 저작이기도 하다.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 1권(한국어판 1·2권) 출간 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 저서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논쟁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논쟁을 타고 이른바 ‘구조주의 시대’가 열렸다. 미완으로 남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 2권(한국어판 3권)은 사르트르 사후인 1985년에 유고 상태로 출간됐다. 1권이 출간된 지 50년 만에 이 기념비적 저작 전체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한국사르트르연구회 소속 전공자 네 사람의 공동 노력의 소산이다.

이 저작의 번역이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은 1400쪽에 이르는 원서의 방대한 분량에도 이유가 있지만,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950년대 전후 상황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한국 지식인들의 황폐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지적 안정제 노릇을 했다. 전기 사르트르 사상을 대표하는 <존재와 무>(1943)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찍이 번역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의 과격 좌익 활동이 알려지면서 ‘과격파 사르트르’가 외면받기 시작했고, 후기 사상이 집대성된 <변증법적 이성 비판>도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사르트르가 이 책을 쓴 것은 1957~1960년 사이 3년 동안이었다. 대작을 쓰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건강을 잃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의 땅거미에 쫓겨 미친 듯이 글을 썼고, 각성제 코리드란을 끼고 살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때의 사르트르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펜을 휘갈겨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하루에 코리드란 한 튜브를 복용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이면 그는 녹초가 됐다. 그는 가끔 모호한 제스처를 하기도 했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도 대작을 완성하지 못했고, 다만 건강을 되찾았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사르트르 후기 사상을 대표한다는 말은 곧 그의 후기 활동을 종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 와중에 그는 현실 자체와 마주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첫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전 이후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소련의 ‘동반자’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2년 사르트르는 ‘두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공산주의와 자신을 거의 일치시켰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반공산주의자는 개다. 나는 평생 결코 공산주의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그는 다시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후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바로 이 20년에 걸친 정치적 실천이 사상으로 응축된 작품이다.

이 저작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57년의 실존주의 상황’을 주제로 한 글을 써 달라는 폴란드 잡지사의 요청이었다. 거기에 응해 쓴 글이 이 책의 서두에 놓인 ‘방법의 문제’다. 170쪽 분량의 이 글이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데, 그 뒤의 본문은 이 결론에 이르는 긴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의 문제’는 원제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였는데, 이 제목이 주장의 요체를 좀더 쉽게 파악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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