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가 말하는 ‘감시에서 벗어나는 법’
매체명 : 한겨레신문   게재일 : 2011-01-26   조회수 : 3867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호모 사피엔스,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루덴스, 호모 파베르, 호모 모빌리쿠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른 동물과 구별지으려고 ‘~하는 동물’이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이토록 인간의 정의가 자주 바뀌는 까닭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본성을 한정된 언어의 틀로 가두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터. 미셸 푸코라면 한마디로 인간을 정의하라는 가혹한 요구에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고백하는’ 동물이라고.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를 하고, 아플 때마다 환자차트를 쓰고, 여행갈 때는 여권으로 신분을 증명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신용카드로 소비를 전시하고, 매일 컴퓨터에 로그인함으로써 신상정보를 노출하며, 일자리를 얻을 때는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이력서를 제출하여 자신의 인생사를 낱낱이 고해바치는 존재. 그것도 모자라 우리는 하루에 80회 이상 감시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을 버젓이 노출하는 어엿한 연기자들이 되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지 않을까.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을 낱낱이 밝힌다. 푸코는 인간이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임을 밝혀낸다. 국가의 인구조사야말로 전형적인 근대적 인간관리 기술이다. 인간을 ‘계산 가능한’ 존재로 계량화하는 것, 저마다의 차이를 다양한 기준으로 수량화하고 서열화함으로써 개개인을 통계의 자료로 격하시키는 권력. 그것이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말하자면 푸코는 우리를 ‘고백하게 만드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연구한 셈이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 직업이나 수입이나 성향을 계산할 수 없는 보헤미안적 존재들이다. 학교와 군대, 감옥과 병원이야말로 개개인의 계산 가능성을 보편화시킨 근대인의 발명품이다. 학교는 성적으로, 군대는 병력으로, 감옥은 처벌로, 병원은 질병에 대한 지식의 권력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신은 누구다’라고 규정하는 모든 행위는 이런 ‘계산 가능성’의 오류를 예비한다. 누군가를 ‘왕따’라고 규정함으로써, 누군가를 ‘우울증 환자’로 판단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대충 이럴 것이다’라고 예단한다. 공항 검색대에서 몸수색을 당하는 순간 누구나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오인받는 것처럼, 누군가를 환자나 범죄자로 만드는 모든 권력은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달려 있다. 푸코는 이 시선의 권력을 파놉티콘으로 설명했다. ‘보는 자’의 시선은 철저히 가려진 채 ‘보이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망감시장치로 투시되는 것. 소통을 위한 시선은 ‘주고받음’을 전제로 하지만 감시와 처벌을 위한 시선은 오직 ‘바라보는 자’의 일방적인 공격이다. 파놉티콘으로 감시당하는 죄수는 간수가 딴청을 피울 때조차도 ‘그가 나를 감시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24시간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모든 권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끈질긴 습속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푸코는 말한다.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나라고. 곧 ‘나는 누구이다’라고 설명하는 순간,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기에 그 설명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광인’이나 ‘범인’을 격리시키는 권력 또한 의문에 부쳐져야 한다. 푸코는 말한다.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고.

우리를 감시하는 갖가지 파놉티콘의 사각지대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행복한 사람은 이 모든 감시카메라를 피해 ‘숨을 곳’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자아’의 유일한 진리는 오직 자아가 변신한다는 사실뿐이라고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규정하고 구속하려는 권력이므로.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푸코는 끊임없는 변신의 권리를 실천하는 것이 인간 해방의 비책임을 알고 있었다. 저 수많은 인간의 정의 중 하나를 굳이 고르라면 나는 ‘호모 에로티쿠스’를 택하련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미소짓게 만들지 않는가. 어떤 존재든 일단 사랑하기만 하면 간도 쓸개도 내줄 줄 아는 아름다운 광기가 있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아직 지구에 살아남은 것이 아닐까. 사랑의 그 끔찍한 계산 불가능성이야말로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소중한 공통분모가 아닐까.

2011.01.15 한겨레신문
정여울 문학평론가
이전글 웨이터가 식탁 옆에 서 있어도 편안히 식사할 수 있는 까닭은?
다음글 [책과 세상] "인터넷은 가장 참여적인 사상의 자유 시장"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