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작가 박경리, 창작 열정 반세기 … 한국문학의 극점을 이루다
매체명 : 중앙일보   게재일 : 2008-05-06   조회수 : 6797
박경리가 끝내 흙으로 돌아갔다.

영정 앞에서 외람된 언사일 수도 있겠지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닐는지 모른다. 기억 속에서 박경리는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건강은, 나이가 있으니까….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아요.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

박경리는 흙의 작가요 생명의 작가였다. 굳이 『토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전의 그는 텃밭에서 일군 채소를 손수 무치고 담가 토지문화관을 찾은 후배작가들에게 먹이곤 했다. 농약 한 번 쓰지 않은, 이른바 유기농 야채였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육신에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폐에 종양이 슬었어도 담배를 끊지 않았고, 한 달 가까이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는 치료진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렇게 박경리는 갔다. 흙으로 돌아갔다.

# 모진 팔자 드센 인생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초저녁에 태어났다. 여기서 ‘초저녁’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생전의 작가가 들려준 사주 얘기다.

“초저녁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초저녁 범띠 생이지.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막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잖아. 여자 사주치곤 기가 아주 센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팔자대로 산 거 같아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여의었고 뒤이어 아들도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62)은 남편 옥바라지로 호된 고역을 치렀다. 딸의 남편, 즉 선생의 사위는 김지하(67) 시인이다. 생전의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토지』에 매달릴 수 있었겠어”라고 되물었다. 1973년에 쓴 『토지』 서문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의 일화도 있다. 박경리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어른이 소설가 김동리(1913∼95) 선생이다. 한데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맨 처음 보여준 원고는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 54년 박경리의 습작시를 일독한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한다. 상심한 그에게 김동리는 대신 “소설을 써봐라” 권한다. 그래서 쓴 소설이 이듬해 ‘현대문학’에 발표된 ‘계산’이다. 박경리의 등단작 말이다. 박경리에게도 인생지사는 새옹지마였나 보다.

# 『토지』 그리고 박경리

『토지』 1부의 배경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 들판. 박경리는 거기 땅 한 번도 안 밟아보고서 『토지』를 썼다. 2부의 주무대가 되는 만주땅 용정도 마찬가지다. 책이 다 나온 뒤에야 그는 소설 속 현장을 둘러봤다. 그러면 『토지』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오롯이 작가의 상상에 기댔던 것일까.

“『토지』는 6·25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있어요. 외가는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콜레라)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가설을 위한 망상』, 320쪽)

그 빛깔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박경리는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평사리의 악양 들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평사리의 풍경이 소설에 묘사해 놓은 모습과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누가 뭐래도 박경리는 『토지』의 작가다. 그러나 『토지』는 단순히 한 작가의 대표작에 머물지 않는다. 『토지』는 한국의 현대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하나의 극점이다. 프랑스 문학이 19세기 국민소설의 시대를 겪었던 것처럼 한국 문학은 『토지』로 인하여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었다.

『토지』가 세운 몇 가지 기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필 기간 26년. 69년 시작해 94년 8월 15일 완결했다. 권수로 21권이고, 원고지 분량으로 3만1200장에 이른다. 등장인물은 700명을 웃돈다. 『토지』는 또 한국형 문화 콘텐츠의 전형이 되는 작품이다. 수차례 TV 드라마로 방영됐고, 영화·가극·창극도 제작됐다. 만화 『토지』와 청소년판 『토지』도 출간됐다. 『토지』의 두 주인공 ‘길상이’와 ‘서희’는 한국소설에서 가장 알려진 캐릭터 중 하나다.

# 토지문화관과 청계천

박경리는 1999년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에 토지문화관(www.togicul.or.kr)을 지었다. 원주 시내에 있던 작가의 집이 개발되자 보상비와 지자체 지원금 등을 모아 세운 문화창작 공간이자 작가 자신의 처소다. 박경리는 여기에 작가 창작실을 마련해 후배 작가들이 공짜로 들어와 서너 달씩 살게끔 했다. 은희경·김선우·천운영·윤성희·천명관·백가흠 등이 토지문화관 단골 손님이다.

강원도 인제의 만해마을과 함께 한국에서 두 군데뿐인 작가 창작실을 두고 있지만 토지문화관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하다. 현재 15개인 작가 창작실을 더 넓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생전의 박경리는 기업의 후원 따위를 한사코 거절했다. 여기저기에 얼굴 비치며 아쉬운 소리 꺼내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까닭이다.

토지문화관은 가끔 토론회와 세미나도 주최한다. 몇 해 전 열린 토지문화관 세미나에서 청계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초로 제기됐다. 그 제안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가 자신의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니까 토지문화관은, 청계천 복원의 꿈이 맨 처음 여문 고향인 셈이다.

그 토지문화관이 주인을 잃었다. 딸 김영주씨가 관장으로 있고, 문화예술 단체의 지원이 당장 끊기진 않겠지만 박경리 없는 토지문화관은 생각만 해도 휑하다. 박경리의 빈자리가 벌써 걱정된다.

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 박경리 삶의 발자취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남 통영 출생
-50년: 남편 김행도와 결혼 4년 만에 사별
-55년: 김동리 추천으로 단편 ‘계산’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등단
-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발표
-69년: 대하소설 『토지』 집필 시작
-72년: 『토지』 1부로 월탄문학상 수상
-92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94년: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21권, 나남출판) 탈고
-96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메달’ 받음
-99년: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 개관
-2003년: 『토지』를 잇는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 가자’ 연재를 시작했으나 3회를 끝으로 중단
-2008년: ‘옛날의 그 집’ 등 시 3편 발표
-2008년 5월 5일: 뇌졸중 등 지병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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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현대문학’올 4월호 발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턱,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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