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지훈학술상

수상자
송호근
수상작품
약력
1956년생 경북 영주 출생
(전) 포스텍 석좌교수
(전) 서울대학교 사회학 교수, 인문사회학 석좌교수 및 대외협력처장
(전) 감사원 자문위원장
(현) 한림대학교 도헌학술원 원장 겸 석좌교수
수상자의 말

지훈(芝薰)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상념에 잠겼습니다. 젊은 시절에 오롯한 등불로 간직했던 그분이 상상의 공간에 재현됐습니다. 자네는 무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4.19 이후 선생이 『고대신문』에 쓰셨던 글이 떠올랐습니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지조 개념이 생존을 좌우할 만큼 절박한 시대를 살지 않았던 저에게는 죽비였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막이하여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학문을 방패로 은신하려 했던 누추한 기억이 떠오르자 다시 죽비가 내리쳤습니다. 지훈 선생의 죽비였습니다. 시대의 와류에서 대학도, 지조도 제대로 건지지 못한 채 퇴직한 저에게 학술상은 감당하기 힘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자조(自嘲)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숙(自肅)하라는 준엄한 명령입니다. 

  자숙하려는 저는 지훈 선생께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억제할 수 없이 분출되는 감정과 감성을 어떻게 그리 절제된 시(詩)로 가지런히 통제할 수 있는지요? 고통과 격동의 시대를 거치지 않은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은 수양의 힘입니다. 학문에도 도량과 관용이 필수적임을 저희들의 수업 시대에는 누가 가르쳐주질 않았습니다. 감성의 소용돌이를 이성의 도랑으로 끌어들여 시적 언어와 융해하는 그 일련의 숙련 과정은 학문의 필수 요건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빈손일 뿐입니다. 흘러내리는 용암을 보고 허허로운 손짓만 할 뿐입니다.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풀잎 단장) 


그렇게 한 떨기 꽃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학문 인생은 한 떨기 영혼이 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뒤죽박죽된 저의 문장과 세파가 침투하는 저의 헤진 사고(思考) 양식으로는 도저히 세상사를 논하기 어렵습니다. 막스 베버의 냉정한 분석과 칼 마르크스의 열정적 비판이라는 두 개의 경계석이 꽂힌 산 정상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하산하는 저에게 지훈 선생의 절제된 언어의 세계가 위안이었습니다.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승무僧舞)


승무를 추는 여인의 감춰진 눈빛에서 번뇌를 읽어낼 수는 없을까요? 세인(世人)들의 희로애락에서 세상의 현실을 간파해 낼 수는 없을까요? 학문과 문학이 용해된 인문학의 너른 시선을 냉혹한 이성과 분석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요? 인간 이해를 절제된 언어의 세계에서 이뤄내는 일을 학문의 지조라고 한다면 저는 이제야 지조론의 본질을 인지합니다.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도 논리의 세계로 이주해 지식 권력의 칼을 휘두르면 대학의 생명은 고사합니다. 제가 혹시 그런 조류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지훈상 수상을 계기로 자숙하고자 합니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주신 나남출판사와 지훈상 심사위원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송호근

심사평

제22회 지훈학술상의 심사보고를 드립니다. 우선 말씀드려야 할 것은 이번부터 상의 공식명칭이 ‘지훈국학상’에서 ‘지훈학술상’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름의 변경에는 나남문화재단과 심사위원들의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조지훈 선생의 학문이 지닌 광대한 넓이와 도저한 깊이를 성찰하면서, 저희는 선생이 추구한 학문적 경지가 특정 영역과 분과학문을 넘어 무릇 인간 정신과 사유의 근원과 정점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새겼습니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문명사적 난국을 조지훈 선생은 어떤 시좌(視座)로 바라보았을까? 그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어떤 정신과 비전으로 학문이 이 위기의 시대에 빛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감히 헤아려 보면서, 지훈정신을 상징하는 이 상이 이제는 ‘국학’이라는 이름을 넘어, 더 넓은 영역의 학문들을 품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학, 인문학,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이룩한 중요한 학문적 성취에 대한 상찬이 조지훈 선생의 정신을 제대로 기리는 길이라는 취지에 합의한 것입니다. 


저희는 이런 근거와 연유에 합당한 올해의 수상자로 송호근 교수를 선정했습니다. 송호근 교수는 한국 사회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자,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중요한 의견과 비판을 개진해 온 공공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특유의 미적 문체로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갔던 에세이스트이자 문필가(文筆家)이기도 합니다. 송호근 교수는 날카로운 글이 세계를 꿰뚫고 들어가 그 작동 논리를 읽어 내고, 글을 읽는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부터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역량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학문적 실천을 통해 보여 준 보기 드문 지식인입니다. 


송호근 사회학은 고전적 의미에서 인문적이며 문학적인 사유와 방법에 종횡(縱橫)합니다. 그의 글은 메마른 사회과학의 개념과 도식, 숫자와 논리로 현실을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날것의 자료와 데이터에 살과 피를 돌게 해서 생명을 부여합니다. 송호근 교수의 저작들에서 우리가 산천의 풍경을 보고, 풍속의 냄새를 맡으며, 살아 있는 인간들의 고투와 욕망을 목격하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이야기로 가득 찬 복잡하고 다층적인 리얼리티입니다. 그리고 이론의 큰 획이 다시 그 리얼리티를 가로지르며 큰 이야기를 던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오롯한 고전적 인문사회학자의 풍모를 보여줍니다. 그는 큰 질문과 시대진단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 징후들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기하는 질문이나 창의적 해답들이 아카데미의 영역을 넘어, 한국 사회의 담론공간을 가로질러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송호근 교수의 학문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저 인문정신의 힘에 빚진 바가 큽니다. 송호근 교수는 한국 사회의 요동치는 현실을 냉정히 관찰하고 진단하여,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사회학적 해답을 추구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희가 이번 시상을 위한 논의 과정에서 특히 집중적으로 주목한 저서가 바로 송호근 교수의 한국 근대성 삼부작입니다. 그는 2011년에 《인민의 탄생》을, 2013년에는 《시민의 탄생》을, 그리고 2020년에는 《국민의 탄생》을 상재했습니다. 출판 과정만 10년에 걸쳐 있고, 연구와 집필은 더 오랜 시간이 투하되었을 저 역작들은 송호근 스칼라십의 한 귀결점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칼 만하임(Karl Mannheim)의 지식사회학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면서 사회학을 시작했고, 노동사회학을 전공하여 그 영역에서 다수의 연구 성과를 산출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사회학자로서 그가 오랫동안 집요하게 궁구한 질문은 한국 근대성의 기원이라는 문제입니다. 

 수많은 논의와 이론과 가설들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묘연하게 남아 있는 한국의 근대 사회와 근대적 시민의 기원은 무엇인가? 송호근 교수의 삼부작은 이 질문을 사회학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공론장’ 개념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공론장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하는 주체들이 서로 동등한 입장으로 토론과 숙의를 통해서 공통의 문제들을 논의하고 풀어 가는 담화 공동체입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에 의하면, 근대사회를 상상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주권적 인민의 관점도 있을 수 있고(혁명), 아담 스미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시장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으며(자본주의), 하버마스가 이론화한 공론장이라는 관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송호근 교수는 세 번째 관점을 취하여 조선시대부터 식민지 시대를 거쳐 가며 역동적으로 형성된 한국 공론장의 역사를 추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근대를 경제학이 주로 다루는 ‘시장’의 역사나 정치학의 ‘국가’ 혹은 ‘혁명’의 과정이 아닌 조선시대부터 뿌리 깊게 형성되어 20세기로 이어져 오는 담화공간과 그 주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확고한 이론적 관점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송호근 교수의 삼부작이 던지는 근본적 질문과 문제의식을 놓치게 됩니다. 그 핵심에는 근대성의 연속이라는 심원한 문제의식과 창발적 문제 제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요컨대 송 호근 교수의 근대성 삼부작에 따를 때 한국 근대의 주인공의 등장과 진화는, 기왕의 학계 연구가 천착해 온 자본주의 시장과 민주주의 체제보다는, 조선시대 이래 문자매체(훈민정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담화공동체 및 평민 담론장에 직결됩니다. 주목할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여러 형태의 공론장들의 역사, 이것이 한국 근대를 가로지르는 유장한 흐름입니다. 이 테제가 바로 송호근 교수의 삼부작이 던지는 굵은 획이자 이론적 종지(宗旨)입니다. 

 《인민의 탄생》에서 저자는 자신이 ‘문해인민(文解人民)'이라고 개념화한 조선시대의 담론주체의 형성과 성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민의 탄생》에서는 1860년부터 1894년까지의 이른바 ‘말안장 시대’에 그가 ‘자각인민(自覺人民)'이라 부른 존재들의 탄생과 그들이 근대적 시민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탄생》에서는 식민지 시기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잔존하며 꿈틀거린 여러 형태의 공론장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구한 공론장의 역사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서 멈춥니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공화정이라는 체제, 그리고 국민이라는 주체의 탄생까지가 송호근 교수의 삼부작이 탐험한 우리의 기원인 것입니다. 


저희는 송호근 교수의 근대성 삼부작이 사회학의 영역을 넘어 역사학과 정치학 그리고 한국학의 영역에서도 더 많이 토론되고 비판되고 검토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연구가 제시한 질문과 대담한 상상력과 사회학적 분석이 우리 사회의 기원을 성찰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기여를 했음을 높이 평가합니다. 앞으로 송호근 교수가 1919년 이후의 한국 근대의 본격적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도 밀도 높은 저서를 산출해 주기를 희망하여, 수상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제22회 지훈학술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박명림
심사위원 김홍중 · 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