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이근화
수상작품
약력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10년 김준성문학상
2013년 현대문학상
2018년 오장환문학상
2020년 상화시인상
수상자의 말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문학 교과 담당이었습니다. 선생님 별명이 ‘나빌레라’였어요. 학생들에게 언제라도 시 낭송을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승무〉를 낭송하기 좋아하셨습니다. 전통무용을 접해본 적도 없고 ‘박사 고깔’도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하실 때면 볼이 조붓하고 갸름한 버선의 맵시가 어렴풋이 느껴졌습니다. 춤사위 속에 숨은 별빛 같은 번뇌는 십대 아이들에게는 좀 어려운 것이었지만 아이들은 주문에 걸린 듯이 함께, “나빌레라”를 외웠습니다. 그때는 제가 시를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나빌레라”가 선생님에게 무엇일까 궁금해 했지요. 지금에 와서 헤아려 보면 그때 선생님께선 지금의 제 나이쯤이셨던 것 같아요. 나이든 선생님은 예민한 여고생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 울퉁불퉁한 저희를 “나빌레라”로 꼭꼭 눌러주셨던 것 같아요. 어디로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를 위태로운 저희들이었습니다. 효과 좋은 알약처럼 “나빌레라”는 마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학년 통틀어 저희 반은 이상하게 단결이 잘 되고, 사고가 적고, 성적이 좋은 반이었습니다. ‘나빌레라’와 함께 한 시간들을 중년이 된 동창생들은 아직도 떠올리곤 합니다.

 현대시는 노래의 주술성으로부터 많이 떨어져 나왔지만 언어를 고르고 매만지는 일에는 언제라도 나의 위치와 삶의 자세에 대한 고민이 담깁니다. 내가 날 잘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조차도 언어는 나의 집, 거처가 되어 줍니다. 다시 읽는 〈봉황수〉라는 작품에는 “품석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없음’에 대한 뼈아픈 발견이야말로 무수히 많은 다른 것들을 다시 돌아보도록 이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훈 선생의 시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과 빛들의 형상은 몸 둘 곳 없는 자의 집이며 거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상의 집 없는 사람만이 천상에 집을 짓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상에 집을 짓는 자들이 시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 지훈 선생의 거룩한 운율과 함께 집을 짓는 자로서, 지훈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된 것에 대해 무한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외롭고 혼자인 것, 말없이 고요히 흔들리는 것, 맑고 그윽한 것. 지훈 선생처럼 계속 그런 것들을 따라가겠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은 조회시간 훈화 말씀이 끝나면 꼭 학생들에게 시를 한 편씩 암송하게 했습니다. 운동장 단상에 올라가 전교생 앞에서 시를 암송하는 일은 어린 저희들에게 큰 고난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저는 목월 선생의 〈나그네〉와 지훈 선생의 〈완화삼〉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순전히 시가 짧고 외우기 쉬워서 한 선택이었으니 청록파의 호흡이 어린 제게 빠르게 스며들었던 것 같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선 크게 감동하시어, 어린 저를 귀애하셨습니다. 초등학생이 어찌 청록파를 알았겠습니까마는 담임선생님조차 들떠서 학교 앞 문구점에 데려가 새 하얀 실내화를 사주셨습니다. 토끼 귀가 그려진 품질 좋은 실내화를 받아 들고 골목길을 ‘우다다다’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께서 보여 주신 호의는 제가 시를 좋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후론 긴 시도 척척 외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공부보다는 책 읽기와 공상으로 많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친구들에게 시를 적은 편지를 보내며 방학을 지냈습니다. 이런 무수히 많은 점들의 연결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시는 ‘다리처럼’ 사람을 건너가게 합니다. 젊은 시절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 절 끌어올려 준 것 역시 시 쓰기였습니다. 위태로움이 저를 압도할 때 쓴 시가 〈아이 라이크 쇼팽〉이었습니다. 그 시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선 횡단보도 앞의 여자가 있습니다. 내가 이를 수 없는 곳을 손끝으로 더듬어 가며 쓴 시가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입니다. 그렇게 쓴 시들을 함께 읽고 다독여 준 동료 시인들이 있고, 저는 여전히 그들을 기억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시를 쓰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건너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알 수 없는 세계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두도록 절 가르친 것은 고양이들입니다. 골목길 담장 위 고양이들의 고요한 눈동자와 사라지는 꼬리들이 저를 매혹했고, 저는 고양이들을 쓰며 시 쓰기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고양이들은 제가 골목길의 어둠에 침잠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세계로 저를 나아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아무 데나 가지 않지만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일, 그게 바로 제가 배운 시 쓰기입니다.


그러나 ‘천상의 집’이나 ‘보이지 않는 다리’ 같은 건 이제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 관련 서적들은 많이 읽히지 않고, 여러 책 가운데서도 일부만 편중되어 소비되고는 합니다. 책을 읽는 일보다 더 쉽고 재밌는 것들이 많습니다. 즐길 거리들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예측하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기술에 대한 믿음과 안정된 삶에 대한 지향이 미래의 인간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줄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교환 가능한 것,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모든 인간 활동의 중심이 될 수는 없을 텐데 과도하게 쏠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난한 노력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빠르게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낙오자로 만듭니다. 우연과 운보다 가혹한 논리가 팽배한 이 세계에서 자기 길을 용기 있게 가는 사람,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차이 너머 그 이상을 사유할 수 있으려면 성찰과 반성뿐만 아니라 여전히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다름과 다음이 없다면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선택과 불가능한 시도도 언제나 환영받을 수 있는 사회를 원합니다.

 오래 전에 토끼 이야기로 숲을 가꾼 베아트릭스 포터가 있었습니다. 정원에서 혼자 이끼와 버섯 등을 관찰하기 즐겨 하던 소녀는 아픈 소년을 위로하기 위해 《피터 래빗》이라는 악동 토끼의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되었지만, 자비 출판을 하여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책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허름한 땅을 헐값에 사들여 방치했답니다. 개발을 저지한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되고 지금 그 넓은 땅들은 천애의 숲을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자연 유산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포터의 그러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울창한 숲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먼 영국 땅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언젠가 그곳 정원과 숲에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나남출판사의 포천수목원을 가만히 상상해 봅니다. 조상호 사장님과 사모님의 덕성이 이루어 낸 수목원의 아름다움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일이 무척 즐겁습니다. 소중한 저희 네 아이들도 포터처럼 나무와 돌멩이, 풀과 벌레들을 사랑합니다. 숲에서 아이들과 귀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벌써 행복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의 ‘산방’(山房)은 대도시 한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있는 공간입니다. 그곳에 시끄러운 배움이 저와 항상 함께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사와 육아가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에 꽤 오래 맞서야 했습니다. 일을 하는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같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에 넣고 뺄 것을 스스로 온전히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인생의 성과를 되돌아보건대, 대부분은 운이 좋았습니다. 또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기에 우연이 이끌어 낸 것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맞이한 아이들은 제게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되어 주었습니다. 삶이라는 교과에도, 문학이라는 교과에도 아이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폭풍 잔소리를 하는 까칠하고 예민한 엄마지만, 날마다 아이들에게 배웁니다. 그 배움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제게 작은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소소한 아름다움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준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었습니다.

 네 아이를 키우며 시를 썼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며 동시를 쓰는 동안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날 수 있었고 그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청소년 시도 쓰고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목소리를 연습한 후에 저는 아주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일상에 관한 산문도 많이 썼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길이며, 다른 사람을 향해 가도록 하는 방법이 되어 주었습니다. 쓰는 행위가 저를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합니다. 글을 쓰는 충실한 순간이 없었다면 사는 게 더 힘들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비정상적 감정들에 휘말리기 쉬운 것 같습니다. 과도한 속도와 변화에 함몰되어 어딘가로 떠밀려 가는 것도 같습니다.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서 좀 더 성숙해지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습니다. 제가 다짐하는 것은 언제라도 쓰는 행위 속에 저를 가만히 정향시키는 일입니다. 계속 쓰면서 나아가겠습니다. ‘사람’이라는 위대한 교과서를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근화

심사평

올해 2024년은 나남출판사가 문을 연 지 45년이 되는 해이다. 지훈상은 어느덧 22회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숫자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나남출판사 측의 조상호 운영위원장과 박해현 상임 운영위원, 신윤섭 상무, 심사 의뢰를 받은 이승하·장석남·조재룡 6명은 2023년 12월 19일 출판사 회의실에 모여 개선책을 논의하였다.

 수상작을 지난 한 해 동안 발간된 시집에만 국한하지 말고 지난 3년 정도 그 시인의 활동 사항을 살펴보자. 각자 수상에 값하는 시인을 추천해 2인 이상이 지지한 시인을 5인 정도로 압축하자. 지훈상은 원로에게 주는 공로상의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자. 또한 시집을 이제 한두 권 낸 신인 급에게 주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 등단 20〜30년 정도 되고, 특히 근년에 들어 눈에 띄게 좋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을 찾아보자.

 이러한 논의가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해가 바뀐 1월 16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만나 한 달간 각자가 찾아본 시인을 거론하였다. 그 결과 2인 이상의 표를 얻은 시인은 정확히 5명이었다. 이근화·성윤석·장이지·황유원·황인찬. 이들 중 어떤 시인이 상을 받아도 지훈상의 권위에 흠이 가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심사위원 세 사람은 한 달 전에 했던 논의를 상기하면서 숙의를 거듭한 결과, 이근화 시인을 제22회 조지훈문학상 수상자로 최종 결정, 출판사 측에 통보하였다. 출판사에서도 흔쾌히 이를 수락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근화 시인은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니 올해로 등단한 지 20년이 된다. 그간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나의 차가운 발을 덮어줘》 등 여섯 권의 시집 외에 연구서 《근대적 시어의 탄생과 조선어의 위상》, 《문학이라는 신세계》, 《시창작론》(공저)을 펴낸 바 있다. 이 외에도 동시집 《안녕, 외계인》, 《콧속의 작은 동물원》과 산문집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 《고독할 권리》,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등을 냈으니 전방위 문필가라고 할 수 있다. 단국대 국문학과를 나왔으며 고려대 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하고 현재 단국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그간 윤동주상 젊은작가상·김준성문학상·시와세계 작품상·현대문학상·오장환문학상·딩아돌하 작품상·상화시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근화 시인은 지난 20년 동안 여섯 권의 시집을 내면서 다양한 색조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가족과 이웃의 삶을 향한 연민 가득한 고찰에서부터 생명, 동물, 자연, 사회, 세계, 문명, 환경, 우주 등을 아울러 다루었다. 즉, 거대담론을 잘 건드리지 않는 시대임에도 주제를 놓치지 않으려는 끈질김을 보여 주었고, 소소한 일상사를 들추면서 독자와의 소통에도 신경을 쓰는 포용력 있는 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이근화의 여섯 권 시집을 한 자리에 놓고 일별해 보니 시의 소재를 아주 다양하게 선택하고 있고, 주제의 색깔이 조금씩 다 다르다. 현대인은 소리에 민감한데 각종 소리와 소음, 기계음 같은 청각적 이미지에 집중하는 시기도 있었고, “흰 눈송이”, “잿빛 세상”, “초록으로 부푸는 물결”, “뻘건 죽 한 그릇”, “비둘기의 청회색” 등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하는 시기도 있었다. 서정시를 쓰는 시인은 대체로 시의 주제와 표현이 균등하여 시집과 시집 사이에 변별력이 없는데, 이근화는 동어반복을 혐오하는지 편편의 시가 색다르다. 시인은 결국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일진대, 이근화 시인은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언어 연금술사이다. 한 권의 시집 속에서도 빛깔이 다른 시들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5명 중에서 이근화로 낙점한 것은 장점이 특별히 뛰어나서도 아니고 약점이 덜 보여서도 아니다. 자연 서정이나 불교적 상상력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역사가 던져 주는 질문에도 답했던 조지훈 시인의 시적 행보에 가장 근접한 시인은 이근화 시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논하는 형식주의자가 아니다. 이번에 우리는 이근화 시인이 지니고 있는 시의 우물이 무척 깊고,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이 우리 시단의 작금의 수확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줄 만큼 시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시의 우물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시 세계가 더욱 웅숭깊어져 한국을 대표하는 큰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제22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이승하
심사위원 장석남 · 조재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