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황인숙
수상작품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약력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1999년 동서문학상
2004년 김수영문학상
2017년 형평문학상
2018년 현대문학상 수상
수상자의 말

받은 메일함을 보니, 지훈상을 운영하는 나남출판사에서 수상 알림 메일이 발송된 게 3월 14일 오후 5시 14분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훈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통화를 출판사와 한 건 그날 낮일 것입니다. 무척 황감하고 기뻤는데, 당시 저는 16일까지 보내야 하는 원고에 대한 압박감으로 두꺼운 밀랍에 싸인 듯한 상태였기 때문에 환호할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전화한 분은 담담한 제 반응에 어쩌면 좀 뒤숭숭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화 통화 후 점점 더 기뻤답니다.

 저는 쓰는 에너지보다 써야 한다는 압박감의 에너지가 훨씬 큰 체질이어서, 일단 그 원고를 보내기까지 다른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런데 달리 해야 할 일은 각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제쳐 두고, 과도한 압박감으로 인한 분별력 상실인지 어느 샌가 이 친구 저 친구 만나서 놀고 있곤 합니다. 그런 판에 수상 소식을 들었으니 어떤 친구한테는 자랑하느라, 또 정말 좋은 시를 써왔는데 상복이 지지리도 없는 친구한테는 딴 데서 듣기 전에 먼저 자복하느라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더 놀았는데, 늘 그렇듯 생각은 원고에 가 있으니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지요. 그렇게 체력과 시간을 탕진한 뒤, 정말 몰릴 데까지 몰려서야 쓰기 시작해서 16일 마감 원고를 27일에야 보냈습니다.

 대체 저는 왜 이런 걸까요? 현재 제가 사용하는 USB를 컴퓨터에 장착하면 화면 오른쪽 상단에 이런 경고문이 뜹니다. “이 드라이브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드라이브를 검사하여 수정하세요.” 어쩌라구! 컴퓨터를 흘겨보며 경고를 지워 버리지만, 언제 어떻게 사달이 날까 조마조마합니다. 제 상태가 이 USB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문제가 있으니 검사하고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검사 결과, 수정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면 USB는교체하면 그만이지만, 저는 어떡하나요. 그냥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 하나 봅니다. 제 못남을 여태 늘어놓는 연유는, 이 수상 소감을 쓰기까지도 같은 여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기 수상자 대부분이 수상 연락을 받고 기쁜 한편 마음이 무거웠다 하더군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지훈상의 무게가 벅찼다는 그분들과 동감이었고, 그에 더해, 수상 소감 25매를 쓸 생각에 짓눌렸던 것입니다. ‘25매, 너무 많다!’가 제 첫 소감이었습니다.

 나남출판사에서 지훈상 1회부터 14회까지 심사 보고와 수상 소감을 모은 책자랑 그 뒤 회차  팸플릿들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이민하도 쩔쩔 맸을 거야. 어떻게 썼나 보자. 나는 힘을 얻으려고 맨 먼저 지난해 지훈문학상 수상자인 이민하의 수상 소감을 펼쳐봤습니다. 이럴 수가! 참으로 실망했습니다. 어쩜 그렇게 조곤조곤 길게 잘도 썼을까요. 지훈문학상도 지훈국학상도 심사 보고나 수상 소감이나, 뭐 하나라도 배울 게 있었으며 읽음직스러웠습니다. 다른 상 수상 소감들에서는 읽을 때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인지 느끼지 못했는데, 지훈상 수상자들은 이민하뿐 아니라 다들 하나같이 수상 소감을 잘 쓰셨더군요. 수상 소감 경연대회에 참관하는 듯했습니다. 두루 토로하는, 기품 있는 상을 받는 자랑스러운 기쁨과 진심으로 느껴지는 겸허함에 지훈상을 새삼 돌아보며 그에 동참하게 된 게 뿌듯했습니다. 문학과 학문에 저마다 성심으로 즐겁게 임하는 삶들을 흘깃 알게 된 것도 같았습니다. 그만한 문학적 자서를 담기에 25매가 짧지 않은가요? 생각하니, 제가 25매에 초장부터 벌벌 떤 것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코앞에 닥친 일로 전전긍긍하느라 날품팔이(밥벌이로 날품 파는 분들께 죄송한 표현이지만)처럼 살아서 사색의 시간이라고 할 만한 것을 당최 못 가진 즉, 서사를 얽어 볼 전망도 성찰도 없는 탓이었습니다. 자서는커녕 자소서도 쓸 거리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지훈문학상 수상소감들을 읽으면서는 수상자들 삶의 풍요로운 문학적 자산과 자질에 감탄하는 한편 기가 죽었습니다. 13회 수상자 김영승의 그이답게 삐딱한 수상 소감을 낄낄거리며 읽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다소 편해져서 글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대한민국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조지훈 선생님의 시 〈승무〉를 여는 한 구절이 입에 배어 있을 것입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청초롬히, 인간이 아닌 듯 아스라하고 사뿐한 동선이 관능적으로 다가옵니다. 게다가 입안에서 궁굴려지는 단어들의 이 감촉이라니요, 침이 고일 듯합니다. 승무에서의 고깔은 수녀님들의 두건과 베일을 합친 것 같네요. 아무리 가녀린 수녀라도 두건과 베일을 쓰고 춤추는 모습은 웃음 없이 떠올릴 수 없는데, 불교보다 기독교가 독단적이고 엄한 교단이라는 걸까? 모르겠습니다. 물론 승무를 출 때 복장은 승복이 아니지요. 그래도 기독교에 종교적 무용은 없는 듯합니다. 아, 대신 음악이 있군요. 〈승무〉는 나이 들어 읽으면 더 감상이 깊어지는 시입니다. 형태의 전아한 아름다움만 보이던 눈에, 종교에 삶을 의탁한 사람의 남다를 고뇌, 지독한 비애 같은 게 어른거리는 것이지요. 물론 순탄하게 살면서도 보다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삶을 추구해서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오래 살면 어지간히 무딘 사람도 절로 깨닫게 되는 게 있는 법이니까, 보다 잘 보고, 보다 잘 듣게 되지요. 그래서 조지훈 선생님의 〈승무〉를 읽으면서, 그 정교한 탐미적 터치 아래 얼비치는 생의 기척을 알아채고, 깊은 음영의 파동을 전해 받는 겁니다.

 전통적 미의식, 풍류, 장인정신, 고결함, ‘지조론’, 대쪽 같으면서도 다정한 성품, 멋쟁이, 선비의 품격 등. 조지훈 선생님에 대해 설핏 갖고 있던 정보로 그동안 저한테 선생님은 우러러보이는, 그러나 나와는 다른 세계의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선생님의 시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 또한 나이의 힘으로 새로 발견한 세계는 저한테 친연성이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의 DNA에서 제 DNA를 찾아낸 듯, 친자 확인을 받은 듯했습니다. 그래서 지훈문학상 수상이 한결 떳떳해졌습니다. 

 그중 한 편을 읽어보겠습니다.


율객(律客)


보리 이삭 밀 이삭

물결치는 이랑 사이

고요한 외줄기 들길 위으로

한낮 겨울 하늘 아래 구름에 싸여

외로운 나그네가 흘러가느니


우피(牛皮)쌈지며 대모(玳瑁)안경집이랑

허리끈에 느즉이 매어두고


간밤 비바람에

그물모시 두루막도 풀이 죽어서

때 묻은 버선이랑 곰방대 함께

가벼이 어깨에 둘러메고


서낭당 구슬픈 돌더미 아래

여울물 흐느끼는 바위 가까이

지친 다리 쉬일 젠 두 눈을 감고

귀히 지닌 해금의 줄을 혀느니


노닥노닥 기워진

흰 조고리 당홍치마

맨발 벗고 따라오던 망내딸년도

오리목(木) 늘어선 산골에다 묻고 왔노라


솔나무 잣나무 우거진 높은 고개

아스라히 휘도는 길 해가 저물어

서늘한 바람결에 흰 수염을 날리며

서러운 나그네가 홀로 가느니


정말 좋지요! 애수로 가슴이 먹먹, 찢어질 듯합니다.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번듯한 집안 자제이신데, 어찌 이런 애옥 삶이며 생의 자욱한 비애를 아시는지요. 그리고 어찌 이리 묘사가 절절한지요. ‘망내딸’을 데리고 다녔었다니 아내도 진작부터 없었겠지요. 오래도록 다듬지 못했을 허연 수염에 허연 봉두난발의 고단하고 외로운 떠돌이 신세. 그 나그네한테 해금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김삿갓 선생님은 시라도 남기셨는데, 율객의 연주 소리는 구름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흩어졌겠지요.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이야기시라고 하나요, 한 편 시에 한 편 영화나 소설을 담는 것 같은, 그런 구조의 시를 저도 간간 쓴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수상 소감을 지훈상 기록 책자 독후감으로 때우는 듯합니다만, 지훈문학상 경우 먼저 수상 소감을 읽고, 자선시를 읽고, 심사 보고로 되돌아가 누가 심사를 했나 확인했습니다. ‘그랬구나. 잘 뽑았네’ 하면서, 때로는 ‘그러면 그렇지’ 비죽이 웃으면서요. 그러면서 제 시집이 이번 심사위원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뽑아 주신 분들, 나남출판사의 조상호 선생님, 조지훈 선생님의 유족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지훈상이 굳건히 장수해서, 조지훈 선생님이 길이 기려지고, 시인들과 학자들에게 오래 버팀목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황인숙

심사평

올해로 21회째를 맞는 지훈문학상 수상자로 황인숙 시인이 결정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본심에서 거론된 여러 시집 중 황인숙 시인의 《내 삶의 예쁜 종아리》가 이번 지훈문학상 수상작으로서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심사위원 모두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으나 지훈의 시 정신이 담긴 이 상의 취지와 무게를 감당하는 차원에서 의견을 붙이고자 한다.

 1984년에 데뷔하여 40년 가까운 시력 동안 황인숙 시인은 여일한 시 세계를 보여왔다. 한결같으면서도 바래지 않는 시의 색깔을 유지해왔다고 해도 좋겠다. 일관되면서도 낡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시의 길을 긴 세월 유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관됨이 지나쳐서 변화를 모르는 낡은 시가 되는 것이 한순간이라면, 새로움에 쫓겨서 자기 고유의 색깔을 잃는 시가 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는 것 또한 오래 견딜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장수하면서도 늘 새롭게 사는 방식은 삶에서도 구하기 힘들지만 시에서도 목격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흔치 않은 사례 중에서도 황인숙의 시가 앞장서서 떠오르는 이유. 시를 논하고 평하는 어느 자리에서건 그의 시가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와도 맞물리는 그것을 더듬어보자면, 우선은 ‘이상한 자연스러움’이라는 말부터 떠오른다.

 익히 알려졌듯이 황인숙의 시에는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맛이 거의 없다. 전혀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 되는 곳에서 그의 목소리는 흘러나온다. 마치 오래 알아온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을 걸어오는 그의 시는 그만큼 친근하고 편안하고 또 그만큼 찬찬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독자에게 안겨준다. 별다른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아서, 아니 아무 무장도 하고 있지 않아서 상대를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재주가 신기하고 신기해서 또 들여다보게 되는 시. 재주라고 했지만 재주의 층위를 훌쩍 뛰어넘는 저 ‘이상한 자연스러움’의 묘기는 절차탁마와 같은 수련의 결과라기보다 타고난 기질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랑을 다해” “재재거”(〈길-여름〉)리는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발화 역시 타고난 기질을 훼손당하지 않고 잘 간직해왔기에 지금까지 유효할 수 있었을 게다.

 돌이켜보면 황인숙의 시에는 아이 같은 호기심과 어른으로서 겪어야 하는 아픔이나 슬픔이나 우울 같은 진득한 감정이 늘 함께 있었던 것 같다. 한데 섞이기 힘든 양쪽의 감정이 무리 없이 녹아들면서 천진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을 함께 발산하는 시.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아이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붙여 오는 와중에 문득 대상의 속 깊은 곳까지 꿰뚫고 들어가는 통찰의 순간을 선사하는 시. 이 또한 ‘이상한 자연스러움’의 묘미를 이루는 시의 면면이라고 할 때, 그 면면을 이루는 특징은 몇 가지가 더 있다. 통찰이 지나쳐서 자칫 무거운 얘기로 빠질 수도 있는 것을 황인숙의 시는 가벼운 위트로 받아넘긴다. 간단치 않은 문제를 간단치 않게 얘기하면서도 결코 무거운 부담감을 독자에게 떠넘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거운 생각은 시인의 내면에서 충분히 소화되고 걸러져서 가볍게 활자로 얹히는 경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주변에서 가볍게 보아 넘기거나 무심코 지나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시간을 보여준다. 가벼운 것을 가볍지 않게 넘기는 황인숙 시의 화자는 그래서 인간이든 고양이든 비둘기든 핍진한 삶으로 내몰리는 존재들에게서 공감과 연민의 시선을 쉬이 거두지 않는다. 그렇게 명랑하게 읽히는 시가 어느 순간 고결함의 언어로, 숭고함의 정신으로 다시 읽히는 일대 반전이 일어나는 것도 황인숙의 시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낮고 외롭고 쓸쓸한/ 당신”(〈동자동, 2020 겨울〉)을 말하는 시가 낮고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순간을 외면할 수 없는 지점에서 황인숙의 시는 다시 빛난다. 오랜 시간 그와 같은 빛남의 순간을 지속해온 한 시인의 노고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올해의 지훈문학상이 새삼 빛나기를 바란다. 

 소감을 마치면서 문득 생각나는 시가 있다. 병마를 앞에 두고서도 친구처럼 대하며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라고 했던 지훈의 시 〈병(病)에게〉가 그것이다. 올곧은 정신과 더불어 아픔이나 고통마저도 친구처럼 품어 안는 너른 품이 느껴지는 지훈의 시에서 세월이 한참 지나 분방하면서도 굳은 심지를 지닌 한 시인의 오랜 시력이 겹쳐 보이는 일이 이상하면서도 자연스러웠음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뜻깊은 상을 받는 황인숙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제21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오생근
심사위원 이 원 · 김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