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이민하
수상작품
《미기후》
약력
1967년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 신인추천으로 등단
2012년 현대시작품상 수상
수상자의 말

그날은 웬일인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것이 잠들기 전의 시간과 깨어난 후의 시간을 연결해 줍니다만, 그날은 새로 써야 할 시간을 예고하는 것처럼 꿈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즈음 저는 무력감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느 날과 같이 길고양이들 아침밥을 챙겨 주고 오후가 될 무렵에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웃들이 일터로 떠난 텅 빈 골목에서는 자잘한 새소리만 먼지처럼 흩날렸을 겁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일상의 굴레 같은 걸 생각하면서 늙어 가는 고양이들과 함께 그날따라 깊게 잠들었었나 봅니다. 아주 멀리서 전화벨이 울렸을 겁니다. 그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저는 멀고도 깊은 곳에 있었을 겁니다. 아득한 수면 아래였습니다. 세 시간쯤 뒤 다시 전화가 왔을 때에야 저는 잠에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수상 소식을 전하는 낯설고 편안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 금세 혈관으로 퍼지는데 저는 연신 제가요? 정말요? 그러면서 웃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다정한 사람이 깊은 잠을 깨우려고 간지럼을 태우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그날 따뜻한 목소리가 저를 깨워 주었듯이, 저의 작은 목소리도 누군가에겐 그렇게 와 닿기를 늘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저녁 무렵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왜 실없이 웃었던 걸까. 우선은 마음이 놓여서 그랬을 겁니다. 상이 주는 의미가 무겁지 않거나 엄숙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언젠가부터 시가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상은 시가 저에게 걱정 마, 안심해도 돼! 그렇게 말하며 건네주는 과분한 정표와도 같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훈 선생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이라니요! 

그러니 한편으로는 전혀 뜻밖이었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당연히 ‘지훈상’이라 하면 지훈 선생의 문학적, 정신적 맥을 잇닿는 지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단순한 생각 때문에요. 누가 읽더라도 눈을 지그시 감고 여운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시. 그런 시를 저 또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모두가 그런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으니까요. 더욱이 지훈상 역대 수상자 중 제가 두 번째 여성 시인이라는 얘길 들었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꾸준히 자신만의 시세계를 모색해 온 많은 여성 시인들의 문학적 성취와 기여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느끼게 될 이런 당혹감이 오래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엇이 시가 되고, 무엇은 시가 안 되는 걸까요. 저는 늘 생각합니다. 답이 없으니 질문만 합니다. 지훈 선생의 시와 저의 시는 닮지 않았습니다. 저의 얼굴은 할아버지와도 닮지 않았는걸요. 그러나 〈풀잎 斷章〉이라는 시에서 “나의 몸가짐도 또한/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던 선생의 고백은 저의 고백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꽃 지는 소리/하도 가늘어//귀 기울여 듣기에도/조심스러”(〈落花 2〉)워하던 분이었습니다. 이 다채로운 시대에 시를 쓰는 까마득한 ‘풀잎’들을 만나셨다면 아마도 그분이라면 “太初의 生命의 아름다운 分身”(〈풀잎 斷章〉)이라 하시지 않았을까요. 

옛 시인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이 제겐 깊은 의미를 줍니다. 시는 늘 멀리 있고 손에 쥐면 흩어져 버려서 쓰면 쓸수록 무능력과 무기력 속에서 헤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태어난 시들이 어둡고 외로운 누군가에게는 다가가 촛불도 되어 주고 잠시라도 함께 있어 준다는 걸 알기에 무작정 설레면서 버텼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누군가의 시를 읽으며 보이지 않던 것들에 눈을 뜨고 비어 있는 자리에서도 체온을 느끼며 살았으니까요. 걸핏하면 언어를 불신하고 의심하다가도 돌아와 보면 늘 시 옆에 누웠던 것 같습니다.


《미기후》는 제게 시집 이상의 존재입니다. 어떤 믿음은 지켜 주었고 어떤 깨달음은 증명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 퇴촌으로 이사를 하신 아버지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하십니다. 3년 전 두 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지실 즈음 저도 심각하게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돌아가신 엄마의 나이를 지나면서부터였습니다. 쉰 이후의 삶을 저는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화근이었는지 제 몸이 조금씩 세상에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온전치 못해서 몇 번이나 포기할 뻔한 시집이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아예 뭉개져 있었습니다. 그곳은 환각의 감옥이었습니다. 

이러다가 영영 글을 못 쓰게 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습니다. 평생의 의지와 안간힘을 그때 다 써 버렸습니다. 간간이 전화가 오면 일부러 웃고 떠들고 구구절절 하소연도 하면서 난생처음 사람들에게 막 매달렸습니다. 그들이 손을 잡아 주어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저는 거울처럼 서로를 붙잡아 주었고 서로의 본보기가 되어 경쟁을 하듯 건강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시인의 말’을 적을 때에 감정이 복받치다 보니 두어 번을 고쳤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포장지 같은 말들을 모두 걷어내 버렸어요. 그제야 후련하고 간명해지는 겁니다. 시집 속에서 저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는데 시들은 정작 사랑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


신의 사랑과

시인의 사랑 이전에

인간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미기후》, ‘시인의 말’


가까스로 시집이 나온 뒤 한두 달 동안은 여전히 시집을 퇴고하는 꿈을 매일 꾸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었고, 악몽이었습니다. 현실 감각을 만회하기가 쉽지는 않았던가 봅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눈에 띄면 마음이 놓일까 봐 책상 위엔 늘 시집을 두었습니다. 수년 동안 큰 방을 버려둔 채 생활하던 조그만 작업방에서 아직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세 계절쯤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프면서 일이 끊긴 지 2년이 훌쩍 넘었거든요. 꼬박 30년을 교정과 편집 일을 주었던 인연과도 단절이 되었습니다. 이제껏 나 혼자 시를 부양해 왔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시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습니다. 당장 생활이 막막해서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하고 자격증도 얻었지만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겁니다. ‘시인 자격증’ 외에는 욕심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더욱이 시인이 되면서 몇 가지 철칙을 세워 두고 나의 역량 밖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창작 말고는 마음을 주지 않았고 글 말고는 생계를 꾸려 보지도 못했습니다. 편협한 사랑이었고 무모한 고집이었습니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자 시인이 되겠다고 일찍이 선언했던 어린 소녀를 내 품에서 내려놓고 낯선 타지로 떠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요즘 문득문득 궁금해집니다. 여덟 살 때 그 아이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열한 살이 되자 그 아이는 시인이 되겠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낙서 같은 시로 대화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말보다는 글을 믿는 사람입니다. 제 자신이 말에 취약한 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글을 보면 사람이 더 잘 보이니까요. 

왜 하필 시냐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족들의 기억 속에는 말이 없었던 아이로 남아 있으니까요. 감당하기 힘든 상처나 비밀이 생길 때마다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는 걸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틈만 나면 글에게 쪼르르 달려가 마음을 풀어 놓으며 그 애만의 공간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나만의 대화로 시작한 것이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 세상과의 대화, 죽음과의 대화로 이어져 오면서 글에게도 살아가는 생이 있구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바라건대 그 아이의 시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주저앉거나 눈치 보지도 말고 외롭고 불안하더라도 딱 자기만의 생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운 사람들과 밤새 얘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는 작고 조용한 빈방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방에 걸린 거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시는 그 빈방으로, 그 거울 속으로 이끌어 주는 안내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상처를, 고통을, 두려움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식어 가는 자신의 손을 잡아 줄 수 있기를요.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시의 멋이고 사랑이고 품격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그날은 정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꿈을 꾸는 날에도, 꿈을 꾸지 않는 날에도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시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꿈을 꿉니다. 그러한 꿈들의 연대가 무기가 없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지킵니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건 흔한 질문인데도 늘 당혹스러워서 매번 생각이 바뀝니다만, 그럼에도 변함이 없는 대답 한 가지는, 나의 시는 모두에게가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건네는 대화라는 것. 모두가 아닌 단 한 사람을 의식하면서 그 보이지 않는 경계 위의 긴장감 속에서 써 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막연하고 모호하던 긴장감마저도 진짜 내 몫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무렵 수상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필 수상자 발표가 4월에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얼마 안 앞둔 시점이어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눈과 귀와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버린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시집을 묶을 때마다 의식을 치르듯 그날에 관한 시를 두어 편씩 싣게 되는데 언제 멈출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시가 물처럼 흐르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에게로. 그렇게 계속 흘러가면서 어떤 절박한 마음들에게 잠깐씩 멈추어 한 모금씩 흡수되는 것. 그것이 시의 삶이고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감각을 잃지 않아야 시대와 전통도 잃지 않을 수 있다고요. 시에 대한 오래된 믿음 중 하나는 시는 함부로 벽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항상 부끄럽고 어리숙해서 퇴고가 많은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기후》를 만난 이후 다행히도 백지 같은 시간이 다시 주어졌습니다. 삶의 여백이 아니라 새로 써야 하는 지면입니다. 다만 앞으로의 생은 퇴고가 적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힘들어서가 아니라 퇴고 없이도 이미 아름다운 삶이 있다는 걸 한 번쯤 믿어 보고 싶어서입니다. 요즘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믿음에 힘을 실어 주신 나남문화재단과 지훈상 운영위원회, 그리고 심사위원회의 여러 선생님들, 아름다운 메아리로 화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얀 미지의 세계 위에 단 하나의 첫발자국을 내딛고 있을 문단 선후배, 동료 여러분께 깊은 애정을 보냅니다. 저는 늘 그들을 질투하고 존경합니다. 사람이 많이 낯설고 어려웠는데 사람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이 시간이 제게는 달콤한 열매가 아니고 귀한 씨앗입니다. 제 몫의 시를 끝까지 키워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민하

 

 

심사평

심사위원들은 각자 다섯 권의 시집을 추천하기로 하고 첫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다섯 권의 시집으로 다시 대상을 좁혀 최종심을 이어 갔으며, 수상작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편차를 드러내는 여러 이야기가 개진되었습니다. 여기서 거론된 시집들 가운데는 심사위원들 사이에 이견을 불러일으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요지는 시집에 응축된 작품성의 밀도와 수준, 예술적 짜임새의 공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훈문학상’이란 이름에 걸맞은 ‘포에지’(poesie), 곧 ‘시정신’의 윤리적 품격과 가치 지향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최종심에서 논의된 시집들에 깃든 ‘정신분열’ 모티프와 해체적 구성법과 실험적 스타일이 ‘지훈문학상’의 설립 취지나 전통적 맥락에 부합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다소간의 논란을 거치기는 했지만, 이민하 시인의 《미기후》는 고통으로 얼룩진 자기 내면의 착란과 혼돈의 덩어리들을 견고한 이미지의 매듭과 첨예하게 침전된 예술적 형식으로 갈무리하는 범상치 않은 공력과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한결같은 공감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지훈 시론의 핵심을 집약하는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나아가는 길’(《시의 원리》)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궁극적인 평가의 합의점을 수반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미기후》를 수상작으로 이끌어 올린 가장 중요한 계기이자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하겠습니다.

 “미기후”라는 말이 ‘지표면의 상태나 지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미세한 기상이나 기후 상태의 차이가 생김’으로 풀이되는 사전적 맥락을 헤아리면, 이 시집의 제목으로 그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실존의 파문과 그 섬세한 마음결의 움직임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시인이 “나도 독창이라면 제법 할 줄 안다. 그러나 당신에게만! 어둡고 우울한 음색을 가졌다면 나는 당신에게 기필코 끌린다. 작고 느리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야릇한 입 모양과 숨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게 된다.”(“나는 침묵으로 詩作한다”, 〈월간 조선〉, 2015.6.)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미기후》에는 시인이 오랫동안 품어 온 고독과 불안과 절망이, 나아가 이들을 빠짐없이 정면에서 아우르려는 ‘방법적인 정신분열’이 촘촘한 기세로 여울져 있습니다.

저 고백의 행간에서 은은한 기색으로 얼비치는 것처럼, 《미기후》는 결코 ‘자아’라고 일컬어지는 작고 좁고 유폐된 개인적 실존의 무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둡고 우울한 음색”을 품고 있는 숱한 소수자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세상의 갖가지 애환과 신음과 통곡을 함께 앓으려는 참된 감응(感應)의 대화술, 그 전율 어린 울림의 순간을 참담한 실존의 무게로 짓눌린 이미지의 다발로 현시합니다. 그러나 이 다발은 또한, 예리하고 단단하게 벼려진 형상들로 도드라진 윤곽선을 틔워 올릴뿐더러, 그 마디마디에서 우리 모두를 탄식하게 만드는 감응의 불꽃을 일렁이게 합니다.

 이 시집에 “언니”, “엄마”, “할머니”, “아빠”, “형부”, “오빠” 같은 가족사의 내밀한 사연들과 연루된 이미지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령”, “누더기 인형”, “움푹 꺼진 씽크홀”, “새끼 고양이”, “고독한 솔로”, “떠돌이 개”, “오르톨랑” 등으로 열거될 수 있을, 우리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빠져나가 버린, 작고 가녀리고 처연한 존재들이 돋을새김의 필치로 전경화되는 까닭 역시 이와 같습니다. “너는 사라졌고 나도 사라졌는데 알 수 없는 우리가 남아 있다.”(〈Sound Cloud〉), “신의 사랑과/시인의 사랑 이전에/인간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시인의 말〉) 같은 대목들이 선명하게 표상하듯, 《미기후》는 나날의 삶으로 주어진 안정성의 표준에선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와 더불어 곁에 있는 미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사랑”했던 “시인”의 비망록이자, 이 “사랑”을 함께했던 “인간의 사랑”을 소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토록 수많은 소수자를 껴안을 수 있을 우리 모두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 곧 “신의 사랑”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미기후》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접신(接神)의 형상들이나, ‘정신분열’에 가까운 병리적 착란의 무늬들은 한편으론 “시인의 사랑”에 깃들인 자기 체험의 깊이를, 다른 한편으론 세상의 뭇 존재들로 열리는 그 모든 “사랑”의 절실한 넓이를 넌지시 일러 주고 있습니다. 지훈이 〈현대시와 선(禪)의 미학〉에서 ‘시인은 선인(仙人)이래도 귀양 온 선인이요 수인(囚人)이래도 자진하여 복역하는 수인입니다.’라고 기술했던 것처럼, 이민하는 제 가슴속 한복판에서 격렬하게 나부끼는 고독과 불안과 절망의 주름을 그 바닥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려는 선정(禪定)의 용맹정진과 같은 차원으로 자신의 시를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닮은 실존을 앓고 있는 소수자들의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게 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더 나아가, 그늘진 뭇 존재들과의 절실한 감응의 순간을 얻기 위하여 제 온몸을 내던짐으로써, “너는 사라졌고 나도 사라졌는데 알 수 없는 우리가 남아 있”게 되는 그 삼매경(三昧境)의 빛살을 직접 마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다다른 것으로 파악됩니다. 《미기후》가 지훈의 〈시선일미(詩禪一味)〉의 현대적 계승자이자 충실한 변형태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큰 이의 없이 이민하 시인을 수상자로 낙점할 수 있었던 계기와 근거 역시 이와 같습니다. ‘지훈문학상’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는 동시에 과감하게 혁신할 수 있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아이러니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최량의 시집은 《미기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상자 이민하 시인에게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려지고 버려지고 일그러진 더 많은 존재, “미기후”(微氣候)라는 말에 빗대어진 무한한 소수자의 세계로 내딛어가는 “시인의 사랑”이 더더욱 아름다운 오체투지의 예술적 광휘로 빛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20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나희덕
심사위원 이원 · 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