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지훈국학상

수상자
문석윤
수상작품
“한국학 고전 텍스트 정본 편성의 의의와 실제”,
“퇴계의 《성학십도》 수저에 관한 연구”
수상자의 말

《맹자》(孟子)에 ‘불우지예’(不虞之譽)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밖의 영예라는 말이요, 실질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데 주어진 명예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금 저의 상황이 딱 그 말에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 감사합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데 외람되게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어 부끄럽고, 또 그런 저에게 이렇게 큰 영예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저의 평소의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고,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께 그리고 장인·장모님께 작은 효도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지훈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이러한 자리를 만들어 주신 나남출판사와 지훈상 운영위원회에 감사드리고, 또 저를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나이가 올해로 만 50이 되었습니다. 공자께서는 50에 지천명(知天命)하셨다고 하는데 저는 이제 겨우 선 느낌입니다. 지난해와 올해 줄곧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학문의 길을 걸어갈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육체적으로도 분명 이전 같지 못하지만 마음은 그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수상은 저에게는 좀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생각건대, 저의 이번 수상은 아마도 지난 10여 년 정도 제가 직접 그리고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던 퇴계 선생의 저작들에 대한 정본 편성사업을 평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퇴계를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박사학위 논문은 17~18세기 조선 성리학의 일대 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을 다룬 것이었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율곡학파 내에서 일어난 논쟁이었습니다. 퇴계집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제가 퇴계 선생에 관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명지대학교 철학과에 자리를 얻은 뒤였습니다. 1995년 8월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당시 교비 지원으로 교수들에게 논문을 쓰도록 하였는데 그때 주제로 잡은 것이 퇴계였습니다. 박사논문의 주제는 율곡학파 내에서 일어난 논쟁이었지만 조선성리학은 결국 퇴계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퇴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조금은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논문을 쓰려고 자료들을 검토하다가, 퇴계집에 최소한 두 가지 판본이 있고 그 두 가지가 수록하고 있는 자료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목판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영인한 文集叢刊本 《退溪集》(癸卯校正本)이고, 다른 하나는 필사본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영인한 《도산전서》(陶山全書)였습니다. 둘 사이에는 일치하지 않은 글자도 있었고, 특히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목판본의 경우 원 편지의 앞뒤를 산절한 것, 편지를 아예 통째로 싣지 않은 것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구가 목판본(더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것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退溪全書》본인데, 목판본 초간본인 경자본을 기본으로 중간본을 본 상태에 따라 합해서 편집한 것)을 기준으로 진행되고 이본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고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본 자료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서간이 시작되는 권 9를 대상으로 두 판본을 오려붙이는 방식으로 통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고 상하에 교감기도 기록했습니다. 꽤 그럴 듯 했고, 나머지도 그런 식으로 통합해서 하나의 텍스트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혹 이러한 작업을 누군가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故 權五鳳 선생의 《退溪家年表》라는 책을 보았는데, 권오봉 선생이라면 그러한 작업을 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그 책에 기재된 선생의 근무지인 포항공대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그만 두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락처를 물었더니 대구에서 무슨 작업을 하시는데 大譜社라고 하는 곳에 연락을 해보라고 합니다. 마침 저의 집이 대구인 관계로 집에 내려간 기회에 수소문하여 찾아가 보게 되었습니다. 권오봉 선생은 만나지 못하였습니다만, 선생님이 작업하고 계시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退溪書集成》(포항공과대학교, 1996)의 작업본이었습니다. 필사본을 풀로 붙여 편집하였고 난하에 간단한 주석을 붙여 놓았습니다. 말 그대로 퇴계의 편지 전부를 연대순으로 빠짐없이 모아 놓은 것이기는 했으나 애석하게도 상세한 교감은 빠져 있었습니다. 실로 집성은 하였지만 아직 정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 전 단계의 정리본이었습니다. 저는 가지고 갔던 박사학위 논문과 간단한 메모를 선생에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메모를 선생님이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텍스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또한 故 李源周 선생이 남기신 퇴계 문집의 판본들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 퇴계집의 판본 사항에 대한 기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으며, 더욱 정본 편성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경, 은사이신 이남영 교수님께서 서울대에서 한국학 관련 장기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었는데 어떤 사업을 하는 게 좋을지 제자들에게 의견을 구하셨고, 저는 퇴계집의 정본을 만드는 사업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남영 교수님께서는 그러한 작업은 서울대 철학과에서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퇴계학연구원 등 퇴계 관련 전문연구기관에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셨고, 제가 그 일의 중대성과 어려움을 너무나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속에는 어쨌든 그것이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2000년 초반, 명지대 내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표를 하나 하라고 했습니다. 별로 발표할 거리도 없고 해서 “퇴계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퇴계집의 정본을 편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같은 과의 김윤구 교수님이 라인홀트 니버라는 독일철학자의 비판본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김 교수님을 통해 서구에서는 비판본을 만드는 것이 연구의 기본적 과정으로 정착되어 있다는 말씀을 들었고, 퇴계의 경우에도 그런 비판본에 준하는 것, 곧 비판적 정본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김 교수님은 계명대 출신으로 이원주 교수님을 잘 알고 계셔서 더욱 기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논문 발표 후 그 발표문을 교내 잡지에 싣기 위해 원고를 정리하면서 《退溪書集成》의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명지대 도서관에는 물론이고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도서관, 고려대도서관, 연세대도서관 등 어느 도서관에서도 그것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직후 저에게 구입을 권유하는 편지가 왔지만 미적거리다가 그 편지도 분실하였고 결국 구입하지 못한 것이 몹시 부끄럽고 또 후회되었습니다.

그때 퇴계학연구원이라는 이름이 생각이 났습니다. 퇴계학연구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아마 거기에는 분명히 그것이 소장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갔습니다. 거기에서 정석태 박사를 만났습니다. 당시 정 박사는 《退溪家年表》의 확장본이라고 할 수 있는 《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이라는 대작을 편성하고 있었습니다(사실 이런 작업이야말로 상을 받을 만한 업적입니다만) 정 박사님과 같이 저녁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정 박사님이 포항공대에서 권오봉 교수님의 조교로 근무한 바 있으며 바로 그 《退溪書集成》의 편성에도 일부 참여를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함께 퇴계집의 정본 편성사업을 같이하자는 막연한 말을 남기고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2000년 10월이었습니다.

2001년부터 인하대 이봉규 교수의 권유로 ‘實是學舍’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碧史 李佑成 선생님의 지도 아래 매주 한 번 茶山의 《詩經講義》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방학 때에는 안동에 내려가 退溪書를 집중적으로 강독하였습니다. 저로서는 너무나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2002년 안동에서 강학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이봉규 교수는 제가 가끔 떠들던 퇴계집 정본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벽사 선생님께 건의했습니다. 벽사 선생님께서는 마침 퇴계학연구원의 원장을 맡고 계셨는데, 이사회를 소집해 줄 터이니 거기에서 취지를 발표하여 이사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퇴계학연구원에서 저와 김윤구 교수, 그리고 정석태 박사가 각각 발표를 하게 되었고, 퇴계학연구원에서는 퇴계집의 정본을 만드는 사업을 공식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후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2002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교육부 재원)의 지원을 받아 1차 정본 편성사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작업결과로 《정본 퇴계전서》 전 15책(각 책 500쪽 내외)을 편성하여 제출하였고, 《퇴계집》의 각 판본을 비롯하여 관련 자료들에 대한 5만 컷에 가까운 고해상도의 디지털 자료를 확보하였습니다. 소요 예산은 사업기간 9억 원 정도였습니다. 그중 8억 원 정도가 교육부 지원이었고, 1억 원 정도가 퇴계학연구원 자체 조달이었습니다. 작업과정에서 저는 한국학술지원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국 주요 25개 도서관에 소장된 《퇴계집》과 퇴계 저작들에 대한 실물 전수(全數)조사를 하여 그것을 두 권의 목록으로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또한 퇴계학연구원(퇴계학진흥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퇴계 저작들의 판본별 소재를 밝힌 저작보 목록을 작성(실무는 함영대 박사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정본편성의 실무작업은 정석태 박사가 총 주관하였고, 최병준, 강여진, 신영주, 하운하 선생 등이 교감 실무를 담당하였고, 이상하 교수가 표점을 담당하였습니다. 저와 이봉규 교수는 퇴계학연구원의 이윤희 선생과 함께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였고, 송재소 선생님과 김언종 선생님께서 연구책임자를 맡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1차 작업된 내용을 그대로 출간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친필 수고 자료들을 포함하여 대조 대본들을 더 보강하여 교감 내용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으며, 세밀하게 확정한 범례에 따라 전체 자료를 재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각 자료에 대한 편집, 작성연대, 문헌특성 등에 대한 기본적 주석을 덧붙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꼼꼼하게 검수 교열 작업을 진행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본과 그 기초자료를 웹상에서 일반인과 국내외의 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서비스하는 프로그램(가칭 ‘퇴계 디지털문헌고’)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작업의 중대성, 그 기초적이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더욱 신중하고 세밀하게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한 제반 후속 작업을 위해서 산문과 편지에 대해서는 제가, 그리고 시에 대해서는 정석태 박사가, 표점에 대해서는 이봉규 교수가 각각 범례안을 마련하였으며, 그 범례에 따른 예시본 2책(서간 및 산문 1책, 시 1책)을 작성하였고, 그에 따라 2차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제 1차 사업이 종료되기 직전인 2008년 5월에 제 2차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 선정되지 못했고, 그 후 현재까지 작업이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좀 장황하게 말씀드렸지만, 퇴계집 정본사업은 이원주 선생님과 권오봉 선생님이 기초를 놓으신 사업이고, 정석태라는 준비된 학자가 있었고, 여러 선생님들께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기에 가능하게 된 사업입니다. 저는 다만 중간에 우연찮게 그 필요성을 느끼고 좀 거들었던 것일 뿐입니다. 그 점에서는 금번 저의 수상의 영예는 사실 그분들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아직 《定本 退溪全書》가 공간되지 못한 점 또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조만간 해당 작업을 진행하여 순차적으로 上梓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정본의 편성과 함께 퇴계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려 합니다. 그간 퇴계 관련 몇 편의 연구논문을 작성하였고, 금번 수상의 대상이 된 논문 “退溪의 《聖學十圖》 修正에 관한 연구”도 또한 그중 하나입니다만, 아직 퇴계 연구의 본령에는 들어서지 못하였다는 생각입니다.

퇴계는 16세기 조선의 지식인 세계의 중심에 서 계신 분으로서, 이전의 정신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분투의 결과는 동아시아 지성사의 전개에 있어서도 중대하고 핵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은둔하여 獨善其身하신 분이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시고, 당 시대의 동아시아 지식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나름대로의 안목을 갖추고 계셨습니다. 그가 200여 인물과 주고받으신 3천여 통의 편지와 宋末부터 明에 이르는 중국유학사를 정리한 《宋季元明理學通錄》 등의 저술이 그러한 면모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인물로서 퇴계의 삶과 사유의 궤적을 더듬어 구명함을 통해, 16세기 조선의 지성사를 기술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지성사 혹은 철학사를 주체적으로 기술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아마 적어도 그러한 두 가지 작업을 완성한 후에야, 지훈학술상을 주신 고귀한 취지에 부합하는 그러한 연구성과를 그나마 내놓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석윤

심사평
저희 심사위원들은 문석윤 교수를 제13회 지훈국학상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대표적인 저작에 대한 언급 없이 대뜸 이렇게 수상자부터 말씀드리는 건 이번 심사회의가 조금 특이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3년간의 저작들을 놓고 수상후보작을 선별한 다음 심사위원들의 이견을 좁혀 수상작을 선정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 저희들은 그런 과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4월 지훈국학상 심사를 위한 첫 모임에서 위원장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수상후보를 선정하기 전 우선 어떤 종류의 연구에 초점을 맞출 건지를 먼저 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수상분야가 한국철학이라면 한국철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한국의 학문풍토에서 꼭 필요한 연구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고 이 범위에서 수상자를 찾아보는 게 어떠냐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만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새로운 해석이나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는 연구보다 당장 빛은 안 나지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 가공하여 이후 연구의 반석을 놓아 주는 그런 연구자, 연구성과를 찾기로 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후보작을 찾아서 다시 의견을 나눌까 하다가 시험 삼아 각 심사위원들이 제1후보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한번 꺼내 보자고 했습니다. 아무런 의견조율 없이 심사위원 3인이 이 사람이면 우리가 정한 조건에 딱 맞겠다 싶은 사람을 써 냈는데 놀랍게도 세 사람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더 이상 심사회의를 할 필요가 없어진 셈입니다. 그래서 그날 바로 문석윤 교수를 수상후보로 정하고 문 교수의 연구업적 중 지훈국학상이라는 묵직한 상에 걸맞는 저술이나 논문을 찾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의 심사과정이 혹시 〈지훈상 규약〉에 어긋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규약집을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히 특별한 과정을 규정해 놓지는 않고 ‘수상후보자의 창작 및 연구결과의 질적 우수성을 수상선정의 1차 기준으로 한다’(지훈상 규약 1장 3조)고 되어 있어 저희들의 심사방식이 오히려 지훈상의 본 정신에 더 부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문석윤 교수는 2006년부터 12년까지 저서 1권, 공저 2권, (공)번역 1종, 논문 5편을 발표하였습니다. 한창 활동할 시기의 학자로서는 양적으로는 적은 편입니다. 그렇지만 각 연구의 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학계의 토론대상이 될 정도로 충실하고 영향력 있는 연구들입니다. 그 중 저희 심사위원들이 특히 주목한 업적은 유일한 저서인 《湖洛論爭 형성과 전개》(동과서, 2006)와 두 편의 논문 “한국학 고전 텍스트 정본 편성의 의의와 실제: 정본 퇴계전서의 사례를 중심으로”(《정신문화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退溪의 聖學十圖 修正에 관한 연구”(《退溪學報》 130, 퇴계학연구원, 2011)입니다.

문 교수의 저서 《湖洛論爭 형성과 전개》는 한국철학 연구분야에서 많이 다루는 흔한 주제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연구물과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자료의 섭렵과 정리라는 기본적인 작업에 충실했기 때문에 이 저술의 결론보다 중간에 제시된 자료가 다른 연구자들에게 더 도움이 될 정도입니다. 이 저술이 가진 더 큰 가치는 자료의 꼼꼼한 정리에 그치지 않고 호락논쟁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호락논쟁’하면 人物性同異, 聖凡心體同異 이 두 문제를 주로 언급했는데 문 교수는 지와 지각의 문제 미발심체의 문제가 실제로는 더 근본적인 문제였음을 밝히고 이것이 성리학이라는 체계에서 어떤 철학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논리정연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한학이나 역사를 공부한 분들은 자료에 매몰되기 쉽고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료에 대한 깊은 천착 없이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문 교수의 이 저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자료에 대한 천착과 철학적 의미 발굴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연구성과 외에 심사위원들이 특히 주목한 점은 문 교수가 자신의 다른 연구를 희생해 가면서 꾸준히 해오고 있는 고전 텍스트의 정본화 작업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인문학, 특히 한국학분야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한국고전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연구가 있지만 정작 그 연구의 바탕이 되는 텍스트에 대한 검토는 미진한 편입니다. 거대담론의 과잉과 거대담론이 부닥치는 한계는 이미 작년 지훈국학상 심사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퇴계에 관한 논문은 전체 한국철학 논문의 20%가 넘는 만 편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퇴계문집의 완역은 최근에야 이루어졌고, 모든 연구자가 표준본으로 삼을 수 있는 정본 퇴계집은 아직 작업 중입니다. 퇴계의 모든 글을 다 모으고 교열한 다음 번역을 하고 이를 토대로 논문은 쓰는 게 차례인 것 같은데 거꾸로 된 셈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희 심사위원들은 문석윤 교수의 “한국학 고전 텍스트 정본 편성의 의의와 실제”와 “退溪의 聖學十圖 修正에 관한 연구”를 주목했습니다. 이 두 논문은 한국학 연구가 외적 지향에서 내적 침잠의 단계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한국학의 토대가 되는 텍스트 정본화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온 논문이라는 점에서 더 높이 평가합니다.

창조, 융합, 창의성 이런 말들이 횡행하면서 연구물들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내놓았나를 가지고 연구자를 평가하는 이 시대에, 시세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묵묵히 텍스트를 교열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인문학의 미래가 있음을 뜻합니다. 문석윤 교수를 비롯하여 기초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노고는 정본화 사업이 이루어지고 난 후 한 세대가 더 지나면 한국 인문학의 체질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13회 지훈국학상 심사를 맡은 저희들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희망이 현실이 되도록 문석윤 교수가 힘써 줄 것도 아울러 당부드립니다.
제 13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심경호
심사위원 허남진・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