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간 〈인간극장〉 등 휴먼 다큐멘터리 세계에 몸담아 온 저자,
그가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발견한 진짜, 그리고 가짜 이야기
저자 윤기호는 공보처의 KBS가 공사로 출범하던 1973년 공사 1기로 방송인의 길을 걷는다. 이미 대학생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등용문을 오른 문사(文士)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다. 이후 40여 년간 그는 줄곧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있었고, 특히 근래 16년은 현장에서 용돈 수준의 제작비에도 굴하지 않고 독보적인 휴먼 다큐멘터리의 금자탑인 〈인간극장〉을 설계?디자인하고 연출?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 이웃들의 평범한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들의 앵글을 거치면 잔잔한 감동을 넘어선 태풍의 울림과 떨림으로 미니 드라마가 된다.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연기자의 숨결을 감동으로 승화시킨다. 그는 적당한 거리두기의 인내심과 치밀한 기획으로 실제 상황을 드라마적 상황으로 연출하는 연금술사임에 틀림없다.
《단상, 혹은 연상?낮선 기억의 재구성》은 문사(文士)이자 다큐멘터리 총감독인 그가 몇 년간 길 위에서 메모했던 명상들을 농익혀 내놓은 에세이집이다. 다큐멘터리 작업 과정에서 리얼한 삶의 맨얼굴을 직면하면서 그가 만난 진짜, 그리고 가짜 이야기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에게 보내는 2016년의 세상만사 이야기이다.
익숙한 모든 것들 속에서 문제없이 살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로도 낯설고, 사람도 낯설고, TV 속의 너스레들도 낯설어졌다./ 결혼식, 장례식도 낯설고, 대중식당과 지하철도 낯설어졌다./ 스스로도 낯설어졌다./ 낮선 느낌을 세상에서 가장 긴 글로 써보려 했다. (본문 중에서)
휴먼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그의 인생은 매번 새로운, 그러나 ‘진짜’인 이야기를 찾아내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제작하는 중에서도 거짓이 발견되면 그〈인간극장〉을 접어야 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가짜와 진짜의 구별법은 오랫동안 그의 화두이자 생존전략의 기본이기도 했을 것이다.
《단상, 혹은 연상?낮선 기억의 재구성》에는 이렇게 그가 체득한 가짜와 진짜 구별법, 그리고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가득 담겨 있다. 이는 신춘문예 출신인 저자의 글 솜씨와 만나 짧지만 때론 재치 있고, 때론 밀도 있는 글들로 되살아난다.
은행 창구 여직원이 처음에는 ‘아버님’이라고 부르더니,/ 아직도 일을 하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순간,/ 슬그머니 ‘사장님’으로 호칭을 바꾼다./ 그래서 이 땅의 아버지들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본문 중에서)우리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은/ 담배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다./ 담배 이외의 것을 좀더 미워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건/ 삶 자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타인을 향한 증오심일 때가 많다. (본문 중에서)
물론 짧은 에세이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긴 글 중 하나인〈색(色)〉에서 저자는 40여 년간 줄곧 추상미술, 그것도 묘법(描法) 시리즈라고 불리는 난해한 그림만을 그려 온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單色畵)’ 예술세계를 평가한다. 사실 박서보 화백은 저자의 매형이기에 수십 년간 그의 작업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누구나 거장의 예술세계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 전문가는 아니지만 40여 년간 영상세계에서 일가를 이룬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박서보론’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의 투영은 충돌의 투영이 아니다. 그가 평소에 자주 말하는 ‘치유’의 경지이자 아름다운 화해의 출발점이다. 비어 있음은 아름답다. 비움을 도모하는 자는 바보스럽지만 당당하다. 비어 있지만 채워져 있고, 채워져 있지만 비어 있는 역설 속에서 여전히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박서보의 화업(畵業) 60년이었다. (본문 중에서)
박서보 화백의 그림은 책 표지와 본문 곳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세계적 화가로 우뚝 선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만나는 것 자체로도 즐거운 호사거니와, 평생을 서로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저자와 박서보 화백의 글과 그림이 한 지면에서 만들어 내는 화학작용은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김영희, 김창렬 화백, 그리고 작고한 신일근 화백의 그림 또한 본문 속에서 어우러져 깊이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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