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배신과 위선과 속물근성, 잔혹성과 인간혐오를 경험한다. 이러한 악덕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 점이 슈클라가 악덕들을 일상의 악덕으로 정의하는 이유다. 물론 악덕들이 사적인 측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공적인 면에서 악덕은 사회와 국가, 나아가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악덕의 결과가 하나의 공동체, 나아가 국가와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우선시하는 것은 잔혹성이다. 슈클라는 기독교인인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자행한 잔혹한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신대륙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경건하고 자유로운 종교인 것처럼 장식하지만 그 이면에는 잔혹성이 전제돼 있다. 잔혹성을 피하기 위해 원주민에게 필요했던 것은 인내와 긍지, 그리고 용맹이었다. 이것은 희생자가 갖는 미덕이다. 이런 의미로 희생자는 미덕을 가진 인물들로 이상화된다. 하지만 희생자의 이상화는 잔혹성을 직시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또한 정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자리를 바꾸기 위해 기다리는 인물일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희생자들을 이상화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교차적으로 잔혹성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가능한 한 진실하고 정확하게 양자 모두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저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두 번째 악덕은 위선이다. 위선은 특히 종교와 믿음의 관점에서 진실한 성격과 성향을 숨기면서, 미덕 혹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슈클라는 위선자를 종교적 위선자와 도덕적 위선자와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종교적 위선자는 신을 기만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모든 종파는 서로에게 위선의 죄를 씌우면서 자신의 종파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다른 종파를 위선자라고 고발한다. 이러한 종교적 논쟁은 이념적 논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념적 갈등은 위선을 최고의 악덕으로 만든다. 종교 분쟁처럼, 반대 세력을 위선자라고 폭로함으로써 반대파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정말 쉽다. 한국의 현재 정치 상황을 보아도 이는 너무나 명백하다. 위선은 공적인 무대, 특히 정치무대에서 잘 드러난다. 이행할 수 없는 공약 이상을 약속하는 정치인, 있지도 않은 신념을 언명하는 정치인에게서 우리는 위선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위선으로 가득 찬 정치무대는 숨기기와 가면 벗기기의 단조롭고 피곤한 일이 반복된다.
위선과 유사한 속성을 갖는 악덕은 속물근성이다. 속물은 모욕의 의미이자 경멸의 표현이다. 속물은 상급자에게는 아부하며 알랑거리지만 하급자를 무시하는 자다. 즉 속물은 사회적으로 하급자인 집단을 피하고,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사회집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속물근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속됐고,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악덕이다.
저자는 파벌 속물근성의 구체적인 예로 미국의 대학 속물을 이야기한다. 관료적인 사회집단으로 배제와 포함의 원칙을 실현하는 하버드 대학과 같은 대학이 이러한 속물이다. 이는 특히 관료적인 한국의 대학 상황과 유사하다.
네 번째는 배신이다. 정치적 배신행위이든 혹은 사적인 배신행위이든 간에 배신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악덕이다. 일상생활에서 배신행위를 해보지 않은 사람과 배신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배신은 너무나 일반적이기에 그 범위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배신은 사적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공적인 관계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애매모호한 특성이 있다. 누가 과연 배신자이고 그 배신의 피해자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행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상술하듯이, 배신은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맥락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발생할 때 애매모호하게 된다. 우리는 압제자들을 사적인 명예나 공적인 안녕을 위해 배신할 수 있다. 이러한 배신을 비난해야 하는가? 또한 남편 친구와 바람난 아내가 남편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고, 남편 또한 이전의 불륜 사실을 아내에게 자백하는 상황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남편 친구는 일련의 배신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과연 누가 비난을 하고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인간혐오다. 일상의 악덕을 증오하는 사람은 인간을 증오할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악덕에 대한 증오로서 나타난 인간혐오는 혐오스러운 인류를 처단하기 위해 폭력을 부추기고 정당화할 수 있기에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역으로 대량학살과 같은 폭력을 막기 위해 정부를 창조하려고 했던 인류의 노력은 긍정적 효과다. 이런 이유로 인간혐오는 정치적 역설이다. 잔혹한 대량학살을 행하는 정부와 그 학살을 금지하는 법을 토대로 창설된 제한된 정부.
결국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는 우리와 함께 하는 악덕이자 우리의 삶에서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악덕이다. 또한 이러한 악덕들은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을 모두 함의할 수 있기에 애매모호할 수도 있다. 우리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인간을 혐오할 수도 있다. 또 잔혹성을 증오함으로써 인간혐오를 완화할 수도 있으며, 정치무대의 위선과 현 사회에서의 속물근성에 나타나는 거짓꾸미기에 나름의 정직과 성실을 주장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분명 이러한 악덕들은 부정한 성격의 표출이지만, 우리는 그것들 없이 살아가기에는 불가능할 만큼 다양하고 다원적인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럼 우리는 일상의 악덕들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저자는 그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일상의 악덕을 고찰함으로써 우리의 삶과 성격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더불어 저자는 모순과 갈등을 감내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좋은 성격을 유지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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