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다: 장인정신 넘치는 별종 편집기자의 자전
편집기자는 그림자와 같은 직업이다. 신문에서는 취재기자가 전면에 드러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편집기자는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에서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이 직업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 아래 그림자 없는 사물이 없듯 이들의 존재는 필수적이고 역할은 작지 않다.
취재기자의 활기,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질박함과 인내심, 그리고 많은 기사를 단시간에 처리하는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지면의 사활을 정확한 판단력과 고도의 언어감각에 거는 편집기자는 순간의 승부사다.
이 책의 저자 권도홍도 편집기자였다. 그것도 “취재기자도 논설위원도 마다하고 오로지 편집에만 매달린 ‘열정적’인 편집기자”였다. 보통의 자서전과 거리를 두는 이 책의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편집기자’였던 권도홍의 자전. 따라서 이 책은 그가 기자로 시종했던 시기에 한한다. 1955년〈부산일보〉기자로 시작해 동아투위 사건으로 1975년〈동아일보〉부장에서 해임되기까지 만 20년 그의 행적은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연상케 하는 장인정신으로 점철돼 있다.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게 미덕인 우리 사회에서 ‘방망이 깎던 노인’의 장인정신은 다른 말로 ‘별종’이라고도 불린다.
호외 편집은 끝났다. 그런데 당시〈동아일보〉에 출입하던 중앙정보부 김보근이 나타났다. 그는 끈질기게 사정했다. 화장실까지 따라와선 ‘변칙처리’를 ‘변칙통과’로 한 번만 봐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일은 봐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김보근은 걸핏하면 전화를 걸어 “권 부장은 경상도 출신인데 어째서 그렇게 구느냐”고 노상 우는 소리를 했다. 박정희도 경상도이고, 자기도 경상도이고, 권 부장도 경상도인데 왜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그 무렵 힘깨나 쓰는 사람치고 경상도 아닌 사람 서울에 별로 없었지.
이 책에 묘사된 1969년의 한 풍경이다. 삼선개혁안 변칙처리를 ‘변칙통과’가 아닌 ‘변칙처리’로 내보낸 신문은〈동아일보〉뿐이었고 그 뒤에는 ‘별종’ 편집기자, 권도홍이 있었다.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
후기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그 20년은 내가 살아온 세월로 나누면 4분의 1에 불과하나 내 삶의 핵이다. 그 중에서도 정신의 치열성으로나 삶의 밀도로 보면 편집기자로 시종한 10년은 핵 중의 핵이다.
물론 ‘그 20년’이란 앞서 말했던 저자 권도홍이 기자로 활동했던 20년을 말한다. 그 20년은 그의 삶의 핵이니 곧 날씨 좋았던 ‘지나간 여름이야기’다. 그러나 별종 편집기자의 여름이 순탄했을 리 없다. 이 책의 태반은 그때 불었던 ‘바람’이야기다.
기자로 출발하던 시기의 이야기는 1부 밤바다에 담겨있다. 첫 꼭지 제목은 “황당한 꿈도 이루어진다”. 대학 졸업장도 없이〈부산일보〉에 찾아간 소년티의 청년이 기자가 되는 과정이 남다르다. 2부 홀로 가는 배는 본격적인 편집기자 시절의 이야기다. “밟아도 안 터지는 지뢰밭의 1년”에서는 “성격이 불같아 걸핏하면 화차처럼 경고 기적을” 울리던〈한국일보〉장기영 사장 아래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3부 폭풍경보는 제목 그대로다. 유신독재시절, 기사의 경중을 판단하고 제목을 결정하는 편집기자였던 저자의 ‘편집권’ 사수를 위한 고분분투기다. 4부 지상에서 살다 간 별무리에는 당대의 인물이야기가 펼쳐진다. 거목 천관우, 술을 고래처럼 마시던 고래떼(술고래 기자들이다. 물론 저자도 그 중 한 명이다), 뛰어난 네 사람의 편집기자들, 그 외에 저자가 만났던 다양한 기자군상까지 인물이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편집기자’라는 직업에 열과 혼을 다했던 저자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편집의 레이아웃이 바뀌고 작업시스템이 진보했다 하더라도 일의 핵심은 그 기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편집기자 혹은 편집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루고자 했고 결국 이뤘던 한 인간의 도전기를, 어두운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사회인의 초상을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맛깔나는 ‘글투’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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