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제
이 책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헤겔의 주저 중 하나인《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강요 제2부 자연철학(구술보충 포함)》을 번역한 것이다. 헤겔은 이념의 필연적 전개과정에 따라 로고스·자연·정신이라는 3개의 개념군으로 나누어 철학적 개념들을 서술했다. 로고스는 추상적 형식 속의 이념이고, 자연은 타재의 형식 속의 이념이며, 정신은 자신에게 복귀한 이념이다. 특히 이 번역서에는 헤겔 사후 미슐레가 헤겔의 강의노트와 수강생들의 필기노트를 정리하여 덧붙인〈보충〉부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헤겔 자연철학 연구의 중요한 전거가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넘어선 제 3의 자연관
오늘날 누가 헤겔을 읽는가? 그것도 그의 자연철학을? 사실 헤겔 자연철학은 헤겔의 저작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분야였다. 이미 19세기부터 헤겔 자연철학은 과학적 사실에 반하는 것으로 거부되기 시작했으며, 어떤 점에서 헤겔 자연철학은 철학적 스캔들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런 자연철학이 오늘날 헤겔에 대한 새로운 독해의 가장 중요한 자원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생태학적 문제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대표적인 자연관은 계몽주의적 자연관과 낭만주의적 자연관이었다. 계몽주의에서 자연은 ‘법칙의 총계’, 자연과학자의 경험과 실험을 통해 그 규칙이 파악되는 객관세계로 파악된다. 이 근대 특유의 자연 개념에 대립하는 것이 자연은 그 법칙의 총계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낭만적 표상이었다. 이 두 자연관은 오늘날 심각한 환경문제에 대한 접근의 배경에 깔려 있는 자연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자연관으로는 결코 환경문제에 적절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들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관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바로 이 맥락에서 헤겔의 자연관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왜냐하면 헤겔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의 자연관을 모두 넘어서는 제 3의 자연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관을 가장 체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 번역된《헤겔 자연철학 ;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강요 제 2부》이다. 헤겔은 일찍부터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구축하려 했는데, 그 노력의 결실이《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강요》다. 그에게서 백과사전은 단순히 ‘모든 학문의 총합’을 넘어 ‘유기적인 모든 학문의 필연적 체계’라는 헤겔 특유의 의미를 갖는다. 헤겔은 철학적 개념들을 로고스-자연-정신의 3 개념군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로고스는 추상적 형식으로 있는 이념이고, 자연은 타자존재라는 형식으로 있는 이념이다. 그리고 정신은 자신에게 복귀한 이념이다. 이에 따라 제1부는《논리학》, 제2부는《자연철학》, 제 3부는《정신철학》 이 다 . 헤겔은 당시 자연과학의 성과를 잘 알고 있었으나, 헤겔은 자연대상과 자연현상의 경험적 연구성과에 대한 서술보다는 자연과학적 진술이 사유 일반의 전체 맥락에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헤겔에서 자연은 타자존재라는 형식으로 있는 이념이다. 자연은 다름 아니라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 속으로 가져올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외면성이 자연의 핵심규정인데, 이 외면성은 개별화(Vereinzelung), 개체성(Individualitt), 그리고 주체성(Subjektivitt)이라는 3가지 형태를 가지며, 이 세 유형에 자연의 세 영역인 역학, 물리학, 유기학이 대응한다. 자연의 이 3가지 영역을 변증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그의 자연철학의 과제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헤겔이 물리학의 인과적 설명처럼 무엇이 무엇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헤겔은 물리학을 하는 이성적 존재인 우리가 전체로서의 자연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하며, 물리학이 연구하는 자연이 또한 그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고 이성적인 행위자로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자연은 인간의 인식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활동 자체가 이루어지는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요구되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라고 하겠다. 또 한가지 헤겔의 자연관에서 중요한 것은 헤겔이 자연을 생명과 전체성이라는 규정 속에서 ‘살아있는 전체’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지구 역시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가능하게 만든 거대한 생명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연의 파괴는 유적 인간의 자살과 같은 셈이 된다.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연을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로 보는 관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근대적 서술이다. 중요한 점은 동아시아의 자연관 역시 이런 유기체적 사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기철학적 사유를 근대적 언어 속에서 서술하는데 헤겔의 사유가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번 번역본에는 헤겔의 헌신적 제자 미슐레(Karl Ludwig Michelet)가 헤겔의 강의자료를 정리한 보충(Zusatz)이 덧붙여졌는데, 이 보충은 헤겔의 자연관의 과학사적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덧붙여 역자의 상세한 역주도 헤겔의 자연과학적 지식과 자연관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